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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사실’과 ‘고의’의 경계

등록 2021-08-29 21:55수정 2021-08-30 02:37

박주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직무대리(왼쪽 둘째)와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맨 오른쪽)이 25일 새벽 국민의힘이 퇴장한 가운데 민주당 단독으로 ‘언론중재법’을 통과시킨 뒤 주먹 인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박주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직무대리(왼쪽 둘째)와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맨 오른쪽)이 25일 새벽 국민의힘이 퇴장한 가운데 민주당 단독으로 ‘언론중재법’을 통과시킨 뒤 주먹 인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한겨레 프리즘] 이승준ㅣ사건팀장

기자들이 취재하다 제일 힘이 빠지고 속상할 때는 언제일까. 기자마다 다르겠지만 내부 고발이나 직장 내 괴롭힘, 성폭력 피해 등의 제보를 자주 접하는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때다. “ㄱ씨가 악의를 가지고 제보했네. ㄱ씨가 평소 품행이…” “배후가 있는 것 같은데…” “한겨레는 우리한테 늘 악의적이네” “노조의 악의적 주장입니다”….

사건팀 기자들이 늘 듣는 말이다. ‘제대로 된’ 사회부 기자라면 취재 초기 피해 사실이, 제보 내용이, 내부 고발이 ‘사실’에 가까운지 살펴보는 데 집중한다. 사실이거나 사실일 가능성이 상당히 클 경우 기자는 취재를 진행한다. ‘원칙을 지키는 언론’이라면 취재를 진행하다 제보 등이 사실이 아닐 경우 취재를 접는다. 그러나 가해자, 갑질의 당사자, 문제를 일으킨 기관·단체나 기업의 담당자 등은 사실관계를 따지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메신저(제보자, 피해자, 내부고발자)의 ‘고의’와 ‘악의’로 프레임을 전환해 자신들의 잘못이나, 불법적 행위를 가리려 하는 경우가 많다. 100% ‘순수한’ 제보자나 내부고발자는 없다. 피해자가 모두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기자들은 누군가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잘못한 ‘사실’과 ‘정황’이 있다면 이를 파헤치고 입증하고 보도해왔다.

사건팀 기자들의 취재와 보도를 1차 게이트키핑 하는 사건팀장으로서 취재 대상이 ‘고의’를 운운할 경우 보도 뒤 일어날 일들을 예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언론사는 ㄱ의 악의적 주장을 바탕으로(…) ㄴ에게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입혔다” 같은 내용이 담긴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신청서나, 민형사 고소·고발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소송이 시작되면 보도가 허위가 아님을 인정받기까지 ‘장기전’이 될 때가 많다. 1심에서 이겨도 상대가 항소하는 경우도 많아 몇년을 소송에 시달리는 기자들도 있다.

‘언론중재법 개정’ 논란을 착잡하게 지켜봤다. ‘제대로 된, 원칙을 지키는 언론’이 적어, ‘나쁜 언론’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언론 보도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손해배상은 필요하기에 ‘징벌적 손해배상’의 도입도 반대할 수 없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본회의 상정을 앞둔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신설 조항 ‘제30조의2(허위·조작보도에 대한 특칙)’을 보다 ‘언론 등의 고의 또는 중과실로 인한 허위·조작보도에 따라’라는 대목에서 기자들에게 ‘고의’와 ‘악의’를 이야기하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입법 논의 과정에서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공직자와 대기업 임원들에 해당하지 않는 ‘얼굴’들도 많다. 작은 사업장의 사장, 대학교수, 사회단체 인사들… 또 전직 공직자, 공직자의 가족, 개인이 아닌 법인이나 단체도 이 법을 활용할 수 있다. 이들이 법정에서 ‘고의’를 언급할 때마다 취재기자들이 이를 어떻게 반박하고 입증해야 할지, 고민 끝에 내부 고발을 하거나 피해를 폭로한 이들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을지 가늠이 잘 안된다.

물론 이 법이 통과된다고 언론 자유가 당장 심각하게 위축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보도일 경우 법원은 기자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법 개정안은 ‘공익신고’와 ‘청탁금지법’ 관련 보도는 예외를 두는 등 보호장치를 두기도 했다.

그러나 ‘고의’라는 입증하기 어려운 모호한 표현은 누군가에게 꽤 요긴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기자 역시 ‘직업인’이기에 잦은 소송에 지치기 쉽다. 나같이 게이트키핑을 하는 이들도 머릿속에 매번 보도의 ‘가성비’를 가늠할지 모른다. 잦은 소송을 감당하기 버거운 작은 언론사 기자들부터 자기 검열에 위축될 수 있다.

사실이 아닌 보도에 따른 피해자 구제의 현실화는 필요하다. 하지만 ‘고의’ ‘허위·조작보도(정보)’ 등 여전히 논란이 되는 개념들은 분리해서 좀 더 신중히 논의해볼 수는 없을까. 어디 의지할 데 없어 언론을 찾아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과,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는 기자들의 마음을 헤아려볼 시간은 없는 것일까.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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