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혐’과 ‘여혐’을 등치하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그래서 용어를 둘러싼 논란도 없지 않다. 여성혐오라는 번역어가 ‘미소지니’의 뜻을 온전히 담지 못해 오해를 부르며, 남성혐오도 ‘혐오’고 여성혐오도 ‘혐오’다 보니 대칭적 용어로 인식되기 쉽다는 것이다.
박권일|사회비평가
공론장의 말들이 엉망진창이다. 욕설과 막말은 차라리 낫다. 그게 나쁜 말인 줄은 어린이들도 아니까. 가장 해로운 건 역시 진영논리와 결합된 음모론이지만, 못지않게 해로운 말들이 있다. 대표적인 게 “남성혐오”다. 많은 매체가 남성혐오를 여성혐오와 함께 언급하며 “남녀갈등” 혹은 “젠더갈등”이라 부르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한국에서 남성혐오가 여성혐오보다 문제라고 강변한다. 모르는 누가 보면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여성권리 1, 2위쯤 하는 나라인 줄 알겠다. 이 혼돈은 대체 무엇일까?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안산 선수를 공격한 논리도, 처음엔 ‘숏컷’이었지만 최종적으로 ‘남혐’(남성혐오)으로 귀결했다. 남성혐오를 상징하는 특정 단어(“웅앵웅” “오조오억”)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여성혐오가 나쁘면 남성혐오도 나쁘다!” 일단 저 단어들이 남성혐오라는 주장부터 별 근거가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남성혐오를 여성혐오와 동급의 사회악으로 놓는 행태다. 많은 언론이 이 구도를 그대로 받아썼다. 그러다 보니 마치 남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한국을 포함해 인류의 대부분은 여전히 남성중심·가부장제 공동체다. 남성차별·남성혐오는 대개 존재 자체가 부정되거나, 존재하더라도 여성차별·여성혐오처럼 보편적이고 치명적인 문제라 볼 수 없다. 여성혐오(misogyny)와 남성혐오(misandry)로 학술검색만 해봐도 금세 확인 가능하다.
언젠가 소셜미디어에 남성혐오가 왜 여성혐오와 다른지를 쓰면서 젠더 권력관계의 비대칭을 근거의 하나로 든 적이 있다. 그러자 프로필에 국립서울대학교 출신이라 밝힌 이가 나타나서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없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일베’의 혐오가 크게 비난받는 것처럼, 남성혐오도 비판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반박했다. 감각적 혐오(disgust), 개인에 대한 모욕(insult), 혐오 표현(hate speech) 등의 개념 차이를 모르거나 무시하기에 나올 수 있는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남혐’과 ‘여혐’을 등치하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그래서 용어를 둘러싼 논란도 없지 않다. 여성혐오라는 번역어가 ‘미소지니’의 뜻을 온전히 담지 못해 오해를 부르며, 남성혐오도 ‘혐오’고 여성혐오도 ‘혐오’다 보니 대칭적 용어로 인식되기 쉽다는 것이다. ‘혐오’ 개념의 남용도 지적된다. 개인 또는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규정들, 예컨대 모욕, 조롱·비하, 혐오 표현, 차별, 배제 등은 각각 다른 의미와 사용 맥락을 가진다. 같은 혐오라고 해도 뱀을 만졌을 때 느껴지는 생리적 혐오와 ‘혐오 표현’의 혐오는 같지 않다. 또한 같은 말이라 해도 대상이 사회적 약자인가 강자인가에 따라서 해석과 규제 수준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이를 전부 뭉뚱그려 혐오라 부르니 오해와 착각이 난무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럼 혼돈을 해결하기 위해 용어 바로쓰기, 즉 ‘정명’(正名) 운동에 나서면 되는가? 물론 용어를 정확히 쓰는 것은 중요하다. 정명은 특히 대중매체 종사자들에게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필수 소양이다. 사태에 언론의 책임이 크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용어법에서만 찾다가는 자칫 더 근본적인 요인을 간과할 수 있다. 크게 두가지다. 차별을 규제하는 제도, 그리고 약자·소수자에 대한 존중 같은 시민적 연대의 문화다.
제도와 문화 중 뭐가 우선인지는 ‘닭이냐 달걀이냐’처럼 오래된 논쟁거리다. 다만 분명한 건 한국의 법과 제도가, 아직 충분한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성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약자에 대한 지원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화를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차별을 방관하거나 조장하는 문화가 만연하면 제도는 허울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2014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52개 나라의 관용성 수준을 평가한 결과 “자녀에게 관용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가르쳐야 한다”고 응답한 한국인은 45.3%로 52위, 즉 꼴찌였다. 한국의 관용과 타인에 대한 존중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 1807달러인 르완다(56.4%)보다도 낮았다. 피땀 어린 경제성장 끝에 대한민국은 이런 ‘선진국’이 된 것이다. 혹시 이것이 혼돈을 설명해줄 유력한 단서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