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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카불의 사라 카리미에게

등록 2021-08-18 13:28수정 2021-08-19 10:18

16일(현지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국제공항이 출국을 기다리는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정권을 재장악하자 이날 날이 밝기도 전에 수천 명의 카불 시민들이 아프간을 탈출하기 위해 공항으로 몰려들었다. 카불 AFP/연합뉴스
16일(현지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국제공항이 출국을 기다리는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정권을 재장악하자 이날 날이 밝기도 전에 수천 명의 카불 시민들이 아프간을 탈출하기 위해 공항으로 몰려들었다. 카불 AFP/연합뉴스

손아람|작가

뉴스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어떤 기사는 수도가 함락되자마자 현금다발을 싸 들고 도망친 대통령을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흥미진진하게 묘사했습니다. 미국의 국제전략 기조를 상세하게 분석한 기사도 있었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접경한 아프가니스탄의 정세 변화에 곤두선 중국의 속내를 넘겨짚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마치 귀환한 영웅을 칭송하듯이, 강대국에 맞선 오랜 투쟁 끝에 승리를 쟁취한 탈레반의 업적을 읊어 내려간 기사도 보았습니다. 그런 기사들에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긴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표정 대신 비행기 바퀴에 매달려 탈출하다 하늘 아래로 곤두박질해 죽은 사람의 실루엣으로 당신들의 사정을 짐작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곳의 삶보다 죽음을 더 상세히 압니다. 그때 저는 당신이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당신은 탈레반 남성들과 강제로 혼인한 여자아이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복장 때문에 살해당한 여성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고문 끝에 죽은 시인과 코미디언에 대해, 멸망을 앞둔 예술에 대해, 우유가 없어 죽어가는 아기들에 대해, 학교에서 쫓겨나고 있는 900만의 여자아이들에 대해, 마침내 얻게 된 고등교육 기회를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 여학생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당신은 탈레반과의 평화협정이 합법적이지 않다고 말했고, 침묵하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편지의 독자들이 자국 언론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의 요청에 응하기 위해 여기 답장을 씁니다.

제가 당신의 편지를 읽은 8월15일은 마침 한국의 광복절이었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된 날입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으면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위종의 연설 ‘한국의 호소’가 떠올랐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헤이그를 방문한 그는 일본이 평화를 거듭 강조하지만 총구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평등한 기회의 약속은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통치로 바뀌었다고 외쳤습니다. 그가 비난했던 세계의 야만성은 당신이 맞닥뜨린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이었습니다.

역사를 배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위종의 호소가 반박할 수 없이 정당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반박 대신 이해할 수 없이 조용했던 응답을 기억합니다. 당신이 ‘세계의 침묵’이라 불렀던 가혹한 고요를. 한국은 세계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나라였습니다. 헤이그의 세계인들은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그들이 한국을 위해 목소리를 낸다 해도 어디에 가닿을지, 어떤 의미와 영향을 가질지 확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잘 모릅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가본 적도, 아프가니스탄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또한 카불에서 날아온 당신의 편지에 대륙 맞은편 서울에서 응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편지에서 절절하게 묻어나는 섭섭한 마음은 한국인인 저에게도 너무 익숙한 것이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계에는 우리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영역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침묵은 합의된 부정의가 아니라 외면으로 인식되지조차 못하는 무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답장하자고 결심하는 것으로 무관심의 유혹에 맞섭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억누르는 그 어떤 권력도 정당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삶의 요구는 서로 다른 법과 종교와 언어가 공유하는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의 싸움에 총 대신 사소한 말을 보탭니다. 저는 당신과 당신 국민들의 살아갈 권리를 지지합니다. 이런 말이 당신을 향해 날아가는 총알을 막아줄 수도 없고, 당신을 향해 다가가는 적을 뒷걸음질 치게 만들지도 못할 것임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지난 전쟁 동안 당신의 정부가 가졌던 무기들도 그런 일을 해내지 못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치게 순진한 접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삶이 위협받는 순간에는 똑같이 순진한 희망으로 세계의 도움을 구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희망이 가진 힘을 믿습니다. 해마다 8월15일이 돌아오면, 바로 그런 순진한 희망이 현실이 된 사건을 기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편집자 주: 사라 카리미는 아프가니스탄의 여성 영화감독으로 “세계가 우리에게 등을 돌려선 안 된다”고 호소하는 편지글을 에스엔에스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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