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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역사의 종말 / 이세영

등록 2021-08-17 16:17수정 2021-08-18 02:36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대표작 <역사의 종말>을 출간한 것은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1년이 지난 1992년이다. 앞서 그는 1989년 가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목격한 뒤 미국 외교전문지 <내셔널 인터레스트>에 같은 이름의 논문을 기고해 지구적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후쿠야마가 말한 ‘종말’은 파멸이나 몰락과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의 종말이 ‘인류의 구원’이라는 신적 섭리의 실현인 것처럼, 그가 말한 ‘역사의 종말’ 역시 이성의 간지에 이끌려온 인류사가 최종 완성태에 도달했다는 긍정의 의미가 강했다. 헤겔주의자인 후쿠야마가 볼 때 세계사는 ‘자유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의 과정인데, 그 움직임을 추동하는 것이 세계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과 대립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적대·경쟁해온 사회주의의 몰락은 세계사가 진보의 종착지에 이르렀음을 고지하는 사건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후쿠야마에게 역사의 종말을 확신시킨 소비에트연방의 해체가 올해로 꼭 30년이 됐다. 1991년 8월 보수파 쿠데타가 가속화한 연방의 붕괴로, 사회주의는 대안 체제의 지위를 상실하고 자본주의·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이데올로기의 차원으로 축소됐다. 하지만 ‘종말 이후’ 펼쳐진 세계사 역시 자유의 확대라는 후쿠야마의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 자유화·민주화의 초입에 진입한 것으로 여겨지던 비서구권의 많은 국가들이 ‘재권위주의화’의 역주행을 경험하고 있다. 이슬람권에선 좌우의 이념 갈등을 세속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의 대결이 대체하면서 내전과 추방, 대량 학살의 지옥도가 펼쳐진다.

이 상황에서 미국이 테러 근절과 자유민주주의 체제 이식을 위해 막대한 자금과 군사력을 쏟아부은 아프가니스탄이 20년 만에 탈레반 수중에 다시 떨어진 것은 대단히 징후적이다. 그 자체로 역사의 종말이란 거대 서사의 허구성을 폭로할 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인종·종교적 소수파 등 세계 곳곳의 약자 집단에겐 여전히 하루하루의 일상이 ‘재앙’이자 ‘파국’에 가깝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아프간 친서방정권이 맞이한 ‘최후의 날’이 잔혹한 ‘보복과 심판의 날’이 되지 않게,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부디 임재하길 기원해볼 뿐이다.

이세영 논설위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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