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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폭동 현장의 노란 참외

등록 2021-08-12 16:15수정 2021-08-13 02:37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조성된 ‘광주대단지’에서 1971년 8월10일 주민들이 열악한 주거환경과 행정당국의 무성의한 대책에 항의해 차량과 시설물을 불태우고 있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조성된 ‘광주대단지’에서 1971년 8월10일 주민들이 열악한 주거환경과 행정당국의 무성의한 대책에 항의해 차량과 시설물을 불태우고 있다.

이세영 ㅣ 논설위원

나고 자란 광주 말고 또 다른 광주가 있다는 건 초등학교 입학 전에 알았다. 어쩌다 서울 작은집에 놀러와 구멍가게라도 찾게 되면 주인은 “어디서 왔느냐”며 실눈을 떴고, “광주”라는 내 대답엔 어김없이 “전라도냐 경기도냐”라는 물음이 되돌아왔다. 국어 교사 어머니는 “글자는 같아도 소리가 다르다”며 우리가 사는 ‘단음 광주’와 서울 아래 있다는 ‘장음 광주’를 반복해 따라 말하게 했지만, 음성학의 장단 범주가 생소했던 내겐 이 광주나 저 광주나 매한가지로 들렸다.

장음 광주의 존재를 뚜렷이 각인시킨 건 대학생이 되어 읽은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다. 이후 나는 그 광주가 언급될 때면 주먹만한 노란 참외를 떠올리곤 했는데, 주인공이 묘사하는 도시 폭동의 강렬한 이미지가 오래도록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탓이다. “삼륜차 한 대가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는 그만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거예요. 누렇게 익은 참외가 와그르르 쏟아지더니 길바닥으로 구릅디다. 경찰을 상대하던 군중들이 돌멩이질을 딱 멈추더니 참외 쪽으로 벌떼처럼 달라붙습디다. 한 차분이나 되는 참외가 눈 깜짝할 새 동이 나버립디다. 진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서는 어적어적 깨물어 먹는 거예요.”

1977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이 소설은 대학을 나와 서울의 출판사를 다니는 ‘권씨’가 주인공이다. 그는 집 한 채 마련해볼 요량으로 철거민 딱지를 사들였다가 당국의 전매금지 조처로 난감한 처지가 된다. 이웃들 강권으로 주민대책위에 발을 들여놓지만 못 배운 이웃들의 거친 행동에 동화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한다. 시위가 벌어진 날 그는 서울로 몸을 피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뒤집힌 삼륜차가 쏟아낸 참외를 “어적어적 깨물어 먹는” 시위 군중을 목격하고선 시위 대열에 섞여든다. 경찰과 드잡이하던 군중을 참외 트럭 앞으로 몰려가게 만든 “무시무시하게 절실한 무엇”이 냉담했던 권씨를 “나체화 같은” 소요 현장의 한가운데로 밀어넣은 것이다.

알려진 대로 소설은 1971년 지금의 경기도 성남에서 벌어진 ‘광주대단지’ 사건이 배경이다. 서울 청계천 일대에서 강제 이주된 철거민들이 당국의 방치와 가혹한 행정 조처에 반발해 소요를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주민과 공무원, 경찰 등 100여명이 다치고 관용차와 버스, 관공서가 불탔다.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 사건은 전형적인 ‘빈민 폭동’으로 분류된다. 폭동은 사회운동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형태에 속하는데, 구조적 요인이 작용하지만 발생이 우발적이고 폭행·파괴·방화 등 폭력이 동반된다. 지도부가 없거나 역할이 미미할 뿐 아니라 목표에 대한 참여자의 공유도가 낮고 지속 기간이 짧다는 점에서 ‘봉기’나 ‘항쟁’과도 구분된다.

흥미로운 건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등장한 집단 저항에는 폭동으로 분류할 만한 사례가 드물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이후엔 광주대단지 사건과 1980년 강원도 태백에서 일어난 사북 사태 정도다. 도시 폭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 견줘도 한국 사회운동의 특이성은 도드라지는데, 여기엔 ‘문민 우위’ 전통에서 비롯된 폭력에 대한 거부감, 국가의 강한 억압을 통해 내면화된 준법 강박, 위기 상황이면 어김없이 발휘되는 연대 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미국·유럽 대도시처럼 계층·인종집단의 지리적 분절이 심각하지 않아 소요 발생의 공간적 조건이 취약하다는 진단도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고 사회적 불안과 분열의 강도가 약한 것도 아니다. 구조화된 실업에 천정부지로 치솟는 부동산값, 갈수록 확대되는 소득·자산 격차, 여기에 코로나발 양극화까지 겹쳤으니, 갈등의 에너지가 “무시무시하게 절실한 무엇”으로 폭발할 조건은 두루 갖춘 셈이다. 하지만 그 에너지가 폭력을 동반한 무정부적 항의의 형태로 분출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이 나라의 하층민들은 분노와 좌절감을 말없이 눌러 삭이거나, 자살이나 증오범죄처럼 왜곡되고 개인화된 방식으로 표출하는 성향이 짙기 때문이다. 이 체념적이면서도 일탈적인 ‘케이(K)-반항’이 누적된 불만을 폭력적으로 집단 분출하는 폭동보다는 ‘덜 파괴적’이라고 안도해도 좋을까.

지난 10일 광주대단지 사건(8·10 성남 민권운동) 50주년 기념식이 성남시 공식 행사로 열렸다는 기사를 접하니, 불현듯 참외 생각이 난다. 이 여름이 가기 전 끝물 참외라도 어적어적 씹어야겠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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