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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걸레 접기의 기술

등록 2021-08-12 13:35수정 2021-08-14 16:35

김영준 | 열린책들 편집이사

대중의 고민에 대해 간결하고 명쾌한 답을 주기로 유명한 어느 스님의 상담 영상을 유튜브에서 가끔 찾아서 보곤 한다. 대개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회사 다니기가 괴롭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아, 그럼 그만두세요.” “그런데 지금 그만두기는 좀 곤란한 상황이거든요.” “아, 그럼 다니시고.” 처음에는 스님의 1초의 에누리도 없는 단호함에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인데(문답 중에 늘 예기치 않은 코믹한 순간이 찾아온다), 계속 보다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질문자들이 원한 게 뭘까? 곤란한 상황의 마술적인 타개책을 정말로 기대한 걸까? 아니면 약간의 낯간지러운 위로와 공감의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일까? 분명한 건 스님은 어느 쪽이든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삶은 누구에게나 고생스러운 것이고 선택의 결과는 각자가 감당할 몫이라는 진실을 냉정하게 상기시켜줄 뿐이다. 이런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을 염려했는지 한번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자신이 대중을 상대로 고민 상담을 해주니 부드러운 마음씨를 가졌을 거라고 더러 오해도 하는 모양이지만, 실상 자기처럼 까다로운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일례로 걸레도 반드시 어떤 모양으로 접어서 어떤 동작으로 닦아야만 법당이 깨끗해지는데, 그대로 따르지 않고 멋대로 하는 제자는 크게 혼이 난다고 한다.

그런데 걸레 접는 모양을 지시하는 것이 꼭 까다로운 성품의 증거인지는 의문이다. 일을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무리 없이 해내는 정도가 아니라 완벽하게 끝내는 사람들―과 가끔 마주치는데, 그들의 공통 특성이 바로 이런 ‘목표에 대한 방법의 우위’인 것 같기 때문이다. 예컨대 걸레질을 눈에 띄게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열심히 했네요 식으로 넘기지 말고 비법을 물어보라. 그러면 주어진 과제를 그냥 수행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한 다음 최적화된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의 통찰을 듣게 된다. 아마 “법당 마루를 깨끗하게 닦기”라는 추상적인 목표는 “먼지를 한 방향으로만 밀어내기”, “방금 닦은 부분에 오염된 걸레가 다시 닿지 않게 하기” 등등의 몇가지 기본 규칙으로 재구성되었을 것이고, 이에 합당한 모양으로 걸레 접는 방법, 팔 움직이는 방법이 도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이렇게만 하면 법당이 깨끗해지는지 실험으로 확인도 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방법은 이미 목표와 결과를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어서 ‘방법’이라고만 부르기도 어렵다.

‘방법의 우위’를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수험생들의 공부법 책이다. 이런 책에서 ‘공부 잘하기’ 같은 추상적인 목표는 대개 ‘월 300시간 공부하기’처럼 구체적으로 재설정된다. 그러나 좀처럼 책상 앞에 못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 그게 가능할까? 얼마 전에 읽은 책에는 별로 어렵지 않은 어떤 훈련을 매일 하면 몇십일 뒤 누구나 이 공부 페이스에 도달한다고 적혀 있었다. 맞건 틀리건 난 감명을 받았다. 저자는 이 방법의 발견이 너무 기뻐서 이를 다듬고 정교화하는 데 몰두할 뿐, 정작 본래의 목표(‘공부 잘하기’였던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합당하고 본받을 태도로 보였다. 방법이 올바르다면 목표는 저절로 달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저절로 달성되는 것들은 중요성이 0으로 수렴되는 게 맞지 않을까?

우리는 어릴 때 목표가 우선이고 방법은 부차적이라고 배워왔던 것 같다. 살아갈수록 어설픈 목표나 기획은 결국 사람의 노력이나 인내에 의지하려 할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목표가 좋은 것보다 좋은 방법을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좋은 방법을 찾아낼 능력이 있었던 목표는 이미 실현되어 우리가 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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