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민 자유기고가
“내가 초라한 거보다 내 자식이 친구 앞에서 초라하게 느끼는 걸 알게 됐을 때, 자괴감이 훨씬 큰 거 같아.” 13살 딸을 키우는 동창이 말했다. 딸 친구가 외국에서 살다 와 영어를 유창하게 한단다. 딸한테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해 죄책감을 느낀다고 그는 말했다. 동창은 대기업 부장이다. 그 친구 딸은 원어민 선생님이 있는 영어학원에 다닌다. 그 친구가 자괴감을 느끼면 나는 어쩌라고. “밥 먹으니까 똥 나온다는 얘기를 영어로 유창하게 하나 보지.” 동창을 위로한답시고 이렇게 말했지만, 나도 영어를 해야 할 때마다 나한테 붙은 가격표를 까발리는 거 같아 쪼그라든다. 한국에서 영어 실력은 학력과 배경을 섞은 계급을 드러낸다.
친구네 회사에서는 과장을 GJ, 대리는 DR라고 쓴다. 대리가 과장한테 이메일을 쓸 때는 호칭을 GJN이라 한다. N은 ‘님’이다. 메일 쓸 때마다 영어변환 키를 눌러야 해서 짜증이 난단다. 보고서는 이런 식이란다. “이 과정은 뎁스(depth, 깊이)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심층 분석이 필요하다는 하나 마나 한 얘기다. “당사가 먼저 이슈(issue, 제안)했을 때 임플로이어(Employer, 고용인)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스트래티직(strategic, 전략적) & 폴리티컬적(political적, 정치적)으로 어프로치(approach, 접근)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먼저 말 꺼낼 때 눈치껏 하라는 하나 마나 한 얘기다. 이렇게 쓰는 까닭은 ‘전문적’인 느낌을 주고 싶어서다.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에 나오는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 캔서야.” 아래 자막이 달린다. “캔서(cancer)=암.” 고급스러운 취향을 드러내고 싶을 때도 영어를 쓴다. 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 <구해줘 홈즈>에서 나무는 우드(wood)이고 전망은 뷰(view)다. 드라마 속 재벌들은 자기들끼리 영어로 말한다.
영어 실력은 ‘계급’을 드러낼 뿐 아니라 결정하는 데도 빠지지 않는 기준이다. 취업시장에서 토익 성적은 주민등록증 같은 거다. 분야랑 별 상관 없어도 그렇다. 심재천의 소설 <나의 토익 만점 수기>에서 토익 점수가 500점대인 주인공은 공채에 응시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자 “이 점수론 한국에서 살아갈 수 없다”며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떠난다. 능력과 영어 실력은 연관검색어처럼 붙어 다니는데, 공정한 척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다들 알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한가구 평균 사교육비(28만9천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영어와 수학이다. 월 소득 200만원 이하(2만6천원)보다 800만원 이상(15만3천원)인 집에서 영어 사교육에 6배 정도 더 썼다. 이 통계엔 1년에 약 1500만원인 외국어중학교나 4천만원이 넘는 제주 국제학교들 학비는 빠져 있다. 2018년에 유학을 떠난 초중고 학생은 9077명이고 행정구역별로 서울 강남구(533명)가 가장 많다.(한국교육개발원) 언어는 습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환경에 큰 영향을 받으니 계급 벽을 세우는 데 안성맞춤이다. 몸에 밴 발음 같은 차이는 넘기 더 힘들다. 게다가 개인의 노력 부족 탓으로 차별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
지난 6월 서울대 청소노동자가 4층짜리 건물을 홀로 맡아 일한 뒤 휴게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조사 과정에서 청소노동자들에게 건물 이름을 영어로 쓰기 등 필기시험을 치르게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서울대는 외국인 학생들 안내에 필요하다고 해명했지만, 안내가 청소노동자의 업무라면 노동에 대한 수당을 지급하고 원하는 사람은 관련 교육을 받을 수 있게 기회를 줬어야 한다. 서울대는 지난 2일 ‘갑질’에 대해 사과했다. 나는 이 영어 문제가 ‘계급’을 환기시키는 시험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겐 급이 있고 그 급은 영어 실력으로 드러난다는 생각이 미세먼지처럼 퍼진 한국에서 익숙한 차별 방식이다. 그렇게 차별을 정당화해야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여러개를 홀로 들게 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