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 사회비평가
유력한 대선주자인 윤석열씨가 주 52시간제를 “실패한 정책”이라며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큰 비난이 일자 그는 “120시간 일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며 “왜곡하지 말라”고 역정을 냈다. 이분, 눈치까지 없다. 사람들은 ‘120시간 일을 시켜야 한다’고 해서 분노한 게 아니다. 말본새에 빤히 드러난 몰상식에 경악한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노조나 좌파들보다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되레 윤씨 발언에 분기탱천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아우슈비츠의 98시간 노동”(김영배) “쌍팔년으로 퇴행”(강병원) 등 격한 비난을 쏟아냈다. 말만 들으면 세상 둘도 없는 노동자의 친구 같다. 하지만 실은 정부와 민주당이야말로 노동자를 위험에 방치한 장본인이다. 다른 사례도 많지만 가장 최근인 7월12일 입법예고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을 보자. 정부는 과로사의 주원인으로 꼽히는 심혈관계 질환, 근골격계 질환, 난청 등 업무상 질병을 법안에서 빼고 삼성 반도체 사례 등 직업성 암도 제외했다. 애초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는 구의역 김군, 서부발전 김용균씨, 평택항 이선호씨 등 노동자의 참혹한 죽음을 더 이상 반복하지 말자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그 법을 누더기로 만들어 무력화시키는 데 최대 역할을 한 정부와 민주당이 윤석열씨를 공격하며 “노동” “인권” 운운하니 가소롭지 않을 도리가 없다. 윤석열씨나 국민의힘 같은 무리를 ‘일자무식한 깡패’라고 한다면, 민주당 같은 무리는 ‘입만 산 양아치’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무지몽매한 말, 표리부동한 말에 휘둘리기보다 노동시간을 줄여야 하는 이유를 되새기는 게 생산적이지 싶다. 왜 노동시간을 줄여야 하는가. 긴 노동시간이 인간의 삶을, 직접적으로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쉬지 않고 오래 일할수록 아프고, 다치고, 금방 죽는다. 이미 수많은 데이터로 증명된 사실이며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체감하는 진실이다. 19세기 산업사회의 노동시간은 연 3000시간이 넘었으나 오늘날 독일, 프랑스의 경우 절반인 1500시간 이하로 줄었다. 한국은 2019년 기준 1967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726시간보다 상당히 길고 여전히 오이시디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마음껏 일할 자유”를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내가 더 일하고 싶다는데 왜 국가가 못하게 하냐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 주었다. “물론 당신이 몸 으스러지게 일하는 건 원칙적으로 자유다. 하지만 당신이 다른 이에게 그렇게 일을 시키면 처벌받을 것이다. 당신의 고용인이 있다면 그가 처벌받을 것이다. 한국 법체계는 전적으로 방임적이지도, 또 전적으로 후견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시민이 서로를 망가뜨리는 일이 허용되진 않는다. 정 마음에 안 들면 이민도 방법이다. 다만 소위 선진국에선 주 5일제가 아니라 주 4일제가 도입되고 있음을 염두에 두시라.”
아이티(IT) 노동자, 연구직 등은 이른바 ‘크런치 모드’로 일하기 때문에 예외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끈질기게 제기된다. 그러나 이미 선택근로제와 탄력근로제 등의 우회로가 존재할 뿐 아니라, 5~29인 사업장인 경우 특별연장근로까지 가능하다. 이 정도 예외조치로도 생산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그냥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외국을 보면 오히려 노동시간을 줄여 생산성을 높인 사례가 적지 않다. 2019년 마이크로소프트 재팬은 5주 동안 주 4일 근무를 시행한 결과 생산성이 전년 동기 대비 40% 증가했다.(<한국일보> 2021년 3월6일)
과거 주 40시간제 도입 당시(강조하건대 주 52시간이 아니라 주 40시간이 원칙이다), 재벌과 경제신문 등은 생산성이 크게 떨어질 거라며 일제히 반발했다. 시행 후 조사해보니 10인 이상 제조업체 1인당 실질 부가가치 산출이 약 1.5%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KDI 정책포럼 자료, 2017년 11월) 줄었다곤 하지만 한국의 노동시간은 지금도 너무 길다. 사람이 계속 죽어나갈 만큼 길다. 과로사 통계가 있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오이시디 나라임에도 아직 과로사의 법적 개념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다. 헨리 포드가 주 40시간 근무제를 선언한 때가 무려 1926년이었다. 노동시간, 더 줄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