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민ㅣ 자유기고가
개가 헥헥거리며 소파를 물어뜯었다. 힘들면 안 하면 될 텐데 열심히 했다. 내가 키우는 누렁이 잡종개 몽덕이다. 한살이 되기 전에 여러 사고를 쳤다. 한동안은 벽지를 뜯어냈다. 청소를 안 해 더러운데 벽 시멘트까지 드러나니 집이 버려진 성황당 같았다. 벽지에 시들해지더니 신발에 몰두했다. 샌들을 꼼꼼하고 성실하게 분해했다. 책도 찢어 씹어 먹었다. 개 위가 두뇌라면 지식을 꽤나 쌓았을 테다.
나는 개의 만행보다 내 반응에 놀랐다. 화가 나지 않았다. 오만 사소한 것에도 분기탱천하며 일기장에 복수를 다짐하는 난데 말이다. 화가 날 때 나타나는 몸의 반응이 없었다. 개가 피워놓은 난장을 치우며 드는 첫 생각은 이랬다. ‘몽덕이가 먹었으면 어쩌지? 똥으로 나와야 할 텐데.’ 내가 입은 피해보다 몽덕이가 먼저였다. 그때 나는 내가 사람을 한번도 이렇게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사랑한다는 말뿐이었지, 대체로 그 사람보다 그 사람에게 상처 입은 내가 먼저였다. 내가 화냈던 순간마다 나는 상대에게 ‘너는 내게 딱 이만큼의 존재’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던 건지 모르겠다.
우리 동네 사는 개 초롱이는 아무도 만질 수 없다. 시골에선 흔하지만 애견숍에선 볼 수 없는 중형견 누렁이다. 초롱이는 한 폐쇄된 공장 마당에 버려졌다. 동네 주꾸미집 사장 아주머니가 구했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초롱이는 내버려 두면 괜찮은데 사람이 제 몸에 손을 대려 하면 물었다. 아주머니도 손을 물려 응급실에서 꿰맸다. 붕대 한 손으로 그는 초롱이를 산책시켰다. 중학생 딸 둘을 둔 아주머니는 오전 11시에 가게로 나가 새벽 2시까지 일한다. 출근 전에, 퇴근 후에, 점심 장사 끝내고 후다닥 집으로 달려와 초롱이를 데리고 나온다. 초롱이는 아주머니만은 따라간다. 그가 새벽 3시에 신발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을 끌며 산책하는 이유는 하나다. 이 개가 세상을 좀 더 행복하게 경험하다 가는 것이다. 초롱이를 공장에서 데려오고 석달 정도 지났을 때, 여전히 지쳐 보이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초롱이가 이제 등을 만지게 해줘. 곧 목욕도 시켜줄 수 있을 거야.”
1년7개월 몽덕이를 키우며 느낀 사랑은 편안했다(몽덕이가 날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랑은 우리가 정말 다르다는 걸 서로 알기 때문에 가능하다. 판단도 기대도 없다. 몽덕이는 내가 인간 세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따지지 않는다. 집이 몇평인지, 대학은 어딜 나왔는지, 연봉은 얼마인지 아무 관심 없다(물론 간식을 주는지엔 지대한 관심이 있다). 몽덕이는 다만 내가 곁에 있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개 옆에선 나 자신일 수 있다. 모멸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다.
나도 몽덕이가 개 세계에서 인기나 지위가 있는지 모른다(없는 거 같다).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에선 개 몽덕이는 무능하다(개의 세계에선 인간인 나는 유해할 테다.) 새만 보면 쫓는다. 새는 날아가버린다. 고양이만 보면 미친 듯이 달려간다. 고양이랑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다. 몽덕이는 개 중에서도 다리가 짧고 고양이는 수직으로도 달린다. 절대 못 잡는다. 몽덕이는 땅을 조금 파고, 지렁이에 몸을 비비고, 내 양말을 벗길 수 있다. 그게 거의 다다. 새를 잡건 말건 몽덕이는 존재 자체로 사랑스럽다(새는 못 잡는 게 낫겠다). 나는 몽덕이가 내 곁에 있어주는 걸로 족하다.
사랑은 무언가를 할 수 있기에 얻는 것이 아니라는 걸, 존재 자체로 받는 것이란 걸 몽덕이는 내게 가르쳐줬다.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 사랑엔 평화가 깃든다는 걸, 평화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나는 개에게서 처음으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