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기다리지 말아요, 늙어빠질 때까지

등록 2021-07-07 17:24수정 2021-12-22 22:27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페미니즘의 선구자인 보부아르조차 노년 여성의 관능적 사랑에 대해선 침묵했다고 비판받았다. ‘여자’와 서른살이 적은 ‘남자’의 연애를 다룬 <빛나는 순간>의 스틸컷.
페미니즘의 선구자인 보부아르조차 노년 여성의 관능적 사랑에 대해선 침묵했다고 비판받았다. ‘여자’와 서른살이 적은 ‘남자’의 연애를 다룬 <빛나는 순간>의 스틸컷.

영화 <빛나는 순간>을 보다가 그 순간에 갑자기 왜 그렇게 마음을 졸였는지 모르겠다. 동굴 안에서 들어오라는 경훈(지현우)의 손짓에 주저하던 진옥(고두심)을 보며 연쇄살인범의 집에 제 발로 들어가는 주인공을 보는 양 주먹을 꽉 쥐고 바짝 긴장했다. 아름다운 제주 중산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맨틱한 장면이 전환되고 난 뒤에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쇄살인범의 집에서 기적적으로 빠져나온 주인공을 보는 것처럼.

영화가 끝난 뒤 내 긴장과 안도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하다 알아냈다. 노년 여성과 젊은 남성의 사랑, 로맨스에 대한 사회적 통념의 위계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을 이것이 드러나 손가락질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불안에는 나 역시 나이 든 여성은 무성적 존재여야 한다는 배타성이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영화는 이런 편견을 바닷속 해녀의 물질처럼 의연하게 헤쳐나가고 있는데 나만 과거시험 맨날 떨어지는 뒤처진 성균관 유생 짓을 자임하고 있었던 꼴이다.

노년에 관한 책과 담론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중 가장 외면되는 게 섹슈얼리티, 특히나 나이 든 여성의 그것이 아닌가 싶다. 부부관계의 중요성, 친구관계의 가치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면서도 ‘연애’라는 단어는 모르는 척한다.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때가 아이들도 가족의 둥지에서 날아가고 배우자는 세상을 떠나거나 애정 또는 유대감이 사라진 지 오래인 경우가 다반사인 중년 이후인데도 말이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가부장의 사고가 공고히 깔려 있지만 엄마의 연애만은 참을 수 없다는 젊은 자식들의 어리광과 이기성도 공모하는 듯하다.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올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에서 미국의 작은 시골 마을에 홀로 사는 칠십대 여성 에디는 오랜 이웃인 남성 루이스를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동명의 영화(2017)에서는 늙은 제인 폰다가 늙은 로버트 레드퍼드에게 이 말을 한다. 마치 집 앞에 눈이 쌓였는데 혼자 치우긴 버거우니 함께 치우는 게 어떻겠냐는 듯한 말투로. 책의 딱 2쪽에 나오는 이 대사에 나도 루이스도 당황하고 말았지만 3쪽으로 넘어가자마자 나도 루이스도 금방 수긍하게 됐다. “밤을 견뎌내는 걸,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좋은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 밤중에, 어둠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어떻게 생각해요?” 생각해보겠다던 루이스는 다음날 아침 이발소에서 이발과 면도까지 하고 그 밤에 종이봉투에 칫솔과 잠옷을 넣어가지고 에디의 집 뒷문을 두드린다. 그도 긴 밤과 일요일 오후의 외로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내내 두 주인공의 조용한 대화를 옮기는 이 소설은 과도한 열정과 현실의 한계에서 급속히 휘발되어버리는 젊음의 연애와 노년의 연애가 어떻게 다른지 보여준다.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에 발 딛고 있는, 인간적인 노력으로서의 연애. 여성의 해방을 주장했던 보부아르조차 나이 든 여성의 관능적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침묵했다는 걸 꼬집은 마사 누스바움은 중년 이후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노년의 사랑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 오랜 시간 동안 겪은 곡절, 그리고 과거를 항상 인식하는 데서 비롯되는 희극과 비극에 대한 감각을 사랑과 결합하기 때문에 그만큼 매력적이다. (…) 노년의 연인들은 모두 뭔가를 잃어버린 적이 있으며,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기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

소설에서 아들의 이기적인 반대와 무책임한 부모로 인해 고통받는 손자에 대한 걱정으로 에디는 루이스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에디의 선택은 경훈과 떠나기 위해 가방을 싼 채로 현관 밖을 쳐다보던 <빛나는 순간>에서 진옥의 표정, 수만개의 단어와 수십년의 곡절이 가득 담겨 있는 그 눈빛과 겹친다.

나이 들었다고 철드는 것은 아니니 물론 노년의 연애가 다 성숙되고 품위 있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우리가 품위를 자랑하기 위해서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니니 중년 이후의 외로움과 사랑에 대해 좀 더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늙은’ 엄마가 연애한다고 해도 비난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밤에 우리 영혼은>의 초반, 각자의 자식들뿐 아니라 보수적인 시골 동네 사람 전체가 노년의 커플을 고깝게 보며 수군댄다. 무엇보다 이들의 궁금증은 세상 어디나 그렇듯 이 둘이 “했냐”다. 어느 날 둘보다 훨씬 나이 많은 루스 할머니가 “(그런 거라면) 우리는 안 해요, 안 했어요”라고 말하는 에디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하는 게 좋아요. 나처럼 늙어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면.” 그것이 ‘하는’ 연애이든 ‘안 하는’ 연애이든 유한한 시간 앞에서 머뭇거리지 말라는, 노년을 향한 가장 따사로운 조언으로 들린다.

김은형 문화기획에디터 dmsgud@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