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서울 여의도 ‘더현대 서울’에 문을 연 ‘샌박편의점’. 서정민 기자
[한겨레 프리즘] 서정민 문화팀장 westmin@hani.co.kr
백화점 안에 희한한 편의점이 들어섰다.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더현대 서울’에 문을 연 ‘샌박편의점’이다. 샌박은 ‘샌드박스’의 줄임말이고, 샌드박스네트워크(이하 샌드박스)는 유튜브 크리에이터 도티, 희극인 유병재 등이 속한 디지털 콘텐츠 엔터테인먼트 회사다. 샌드박스가 소속 인기 크리에이터들의 세계관을 오프라인 전시로 선보이고자 오는 15일까지 운영하는 팝업 전시공간이 편의점의 정체다.
오픈 첫날 낮에 찾아간 편의점은 20~30대 젊은층으로 붐비고 있었다. 입구 가판대에는 월드 클래스 아이돌 듀오 매드몬스터와 카페 사장 최준이 각각 표지 모델로 나온 잡지 <맥심>, 한사랑산악회 회원들이 표지를 장식한 월간 <산> 등이 진열돼 있었다. 전시회를 위해 따로 만든 게 아니라 실제 잡지사에서 발간한 것들이다. 편의점 안에는 매드몬스터 로고를 새긴 모자 등 굿즈, 한사랑산악회 문구를 새긴 등산용품, 김갑생할머니김 제품 등을 팔고 있었다.
샌박편의점 가판대에 진열된 신문과 잡지. 서정민 기자
이쯤 되면 누구는 손뼉을 치며 반길 것이고, 누구는 이게 뭔 소린가 하며 어리둥절할 것이다. 이들 세계관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의 차이다. 유튜브 콘텐츠 ‘비(B)대면 데이트’로 유명한 최준은 희극인 김해준이 연기하는 캐릭터다. 매드몬스터는 희극인 이창호와 곽범이 각각 ‘제이호’와 ‘탄’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가상의 아이돌 듀오다. 그런데 가상이 가상이 아니다. 실제로 노래를 발표하고 음악방송에도 출연한다. 이창호는 한사랑산악회의 이택조 부회장, “시가총액 500조원의 코스피 1위 기업”(이라 우기는) 김갑생할머니김의 이호창 미래전략실 본부장이 되기도 한다.
황당한 상황이 가능한 건 이른바 ‘세계관 놀이’ 때문이다. 이창호의 각기 다른 세계관은 서로 침범하거나 충돌하지 않고 평행우주처럼 병립한다. 요새 유행하는 멀티버스(멀티+유니버스)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세계관 속으로 이물감 없이 들어간다. 매드몬스터 세계관에선 “우리 오빠 최고”라며 아미(방탄소년단 팬클럽)보다 더 열렬한 포켓몬스터(매드몬스터 팬클럽)가 되고, 이호창 본부장 세계관에선 그가 피포지(P4G) 서울 정상회의 비즈니스 포럼 연사로 나서 전세계인 앞에서 이에스지(ESG. 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선언하는 홍보 영상에 “김갑생할머니김 입사가 꿈입니다”라는 댓글을 단다.
샌박편의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김갑생할머니김 제품. 서정민 기자
이런 세태를 마뜩잖게 보는 시선도 있다. 세계관이란 세계를 보는 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뜻하는데, 아무 데나 갖다 붙이면서 그 의미가 휘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의 세계관 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중노년 세대의 당혹스러움에서 세대격차나 갈등이 드러나기도 한다. 매드몬스터 유튜브 영상 댓글과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노출된 <한겨레>의 매드몬스터 인터뷰 기사 ‘
“서태지 이후 가장 혁명적 그룹”…이런 아이돌, 나만 몰랐어?’에 달린 진지한 댓글의 온도 차가 대표적이다.
요즘 젊은 세대가 세계관 놀이에 빠진 건 왜일까? 이유야 많겠지만,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씁쓸함을 잠시나마 잊고자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건 아닐까? 샌박편의점에서 만난 김다슬(27)씨는 카페 사장 최준에게 푹 빠졌다고 했다. 행복한 표정으로 최준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 머그컵 등을 집어들며 그는 말했다. “영상을 처음 봤을 땐 말투와 표정이 오글거리고 꺼려졌지만, 자꾸 보니 예쁘고 좋은 말들뿐이더라고요. 남들을 낮잡아보고 깎아내리며 웃기는 개그도 많은데, 좋은 말로만 웃길 수 있다는 게 참 좋았어요. 세심하게 챙겨주는 말을 들으면 제 자존감도 높아지고요.”
최근 정치인들이 줄줄이 대선 출마 선언을 하며 저마다 추구하는 국가관과 세계관을 내세우고 있다. 그중엔 현실과 동떨어져 말뿐인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알맹이 없는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얼마나 피부와 가슴에 와닿는 희망을 주느냐에 따라 유권자들 마음도 움직이지 않을까 싶다. 잘 모르겠다면, 최준부터 보시라. 처음엔 힘들어도 서서히 ‘준며들’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