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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국제노동기구 협약 비준이 먼저다 / 김호규

등록 2020-11-23 18:50수정 2020-11-24 02:38

노동법 개정 왜 어떻게

김호규 ㅣ 전국금속노동조합 위원장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앞서 <한겨레> 연쇄 투고로 지적됐듯 제출이 임박한 ‘한-유럽연합(EU) 에프티에이(FTA) 전문가 패널 심리보고서’를 통해 에프티에이 노동조항 위반이 공식 확인되는 첫번째 나라로 한국이 지명될 수 있다. 불명예를 넘어, 미국 등 다른 국가와의 에프티에이에서 같은 취지의 의무 규정 위반으로 동반될 실질적 불이익 조처도 크게 우려된다.

시간이 많지 않다.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은 즉시 비준해야 한다. 당장 실행하더라도 너무 늦은 약속 이행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양치기 소년이었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비준하겠다, 의무를 이행하겠다, 공식 약속만 벌써 수차례다. 그 약속 모두를 어겼다. 국제노동기구 협약 비준을 또 미루는 것은 신뢰할 만한 국제사회의 일원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먼저 국내법의 완전한 개정은 국제협약 비준의 전제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해야 한다. 국가가 체결한 국제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국제노동기구 협약 비준이 국내법 개정의 사후 인증이 아니라는 말이다. 장래에 국내법을 협약에 부합하게 개정해 나갈 의무를 사전에 수락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 ‘국내법이 개정되어야 협약을 비준할 수 있다’ 또는 ‘국내법 개정과 동시에만 비준할 수 있다’는 말은 틀렸다. 먼저 국제노동기구 협약을 비준하고 국내법을 그에 맞도록 바꾸는 것이 올바른 경로다. 민주노총은 반복해서 국제노동기구 협약 선비준을 주장해왔다.

지금 쟁점인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은 국제노동기구 모든 회원국이 비준해야 하는 핵심협약이다. 국제노동기구가 100년 동안 채택한 189개 협약 중에 핵심협약은 8개뿐이다. 강제노동, 아동노동 금지 같은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핵심협약은 더 후퇴할 수 없는 최저선이라는 뜻이다. 최저선은 달리 말하면 무조건이라는 거다. 기본협약 비준에 조건을 붙여서는 안 된다.

얼핏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것 같은 국제노동기구 협약 비준이 이렇게까지 날카로운 쟁점이 되는 것은 정부가 제출한 노동조합법 개정안 탓이다. 정부 법안은 애초 목적에서 벗어나 길을 잃었다. 크게 두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정부 법안은 노동조건을 역진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회원국에 의한 협약의 비준이 협약에 규정된 조건보다 노동자에게 유리한 조건을 보장하고 있는 법률에 영향을 줄 수 없다.” 1991년 11월20일 국회가 수락 동의한 국제노동기구 헌장의 규정이다.

그러나 정부는 협약 비준에 따라 ‘보완장치를 마련’하겠다며 권리행사를 제한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산별노조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제한을 강화했다. 사업장 내 쟁의행위 방법에 대한 금지를 추가했다. 어불성설이다. 협약 비준을 위한 법개정 절차는 현행법에 보장된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이어야지 축소하는 방향일 수 없다.

우리가 비준하려고 하는 국제노동기구 협약 87호도 역진 금지를 규정한다. 국제노동기구 협약 87호를 비준하는 과정에서 비준의 목적인 바로 그 협약 87호를 어긴다면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게 된다. 결사의 자유 협약을 비준하기 위해 결사의 자유를 후퇴시키는 것은 말장난이다.

둘째, 정부 법안은 유럽연합의 문제 제기에 침묵한다. 이번 법개정의 중요한 동기는 한-유럽연합 에프티에이 제13.4조 3항 위반에 따른 분쟁절차 개시 여부다. 유럽연합은 우리가 핵심협약을 비준할 의무를 해태하고 있으며, 우리 노동조합법과 형법이 노동기본권에 관한 원리를 존중·증진·실현할 의무를 위반한다고 지적했다.

노동조합법 개정 방향은 이에 맞춰야 한다. 노동조합법이 특수고용노동자에게도 적용돼야 한다. 조합원의 범위와 자격은 노동조합의 자율 결정에 따라야 한다. 종사자냐 아니냐는 구분은 무의미하다. 자의적으로 노동조합의 인정 여부를 결정하는 설립신고제를 폐지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 법안은 동문서답이다. 특수고용노동자, 노동조합 임원 자격, 설립신고제를 놓고 현행 법조항을 거의 손대지 않았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30년의 숙원을 해결하고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될 것인가, 노동에 대한 국제기준과 전근대적 국내법 사이의 긴장을 폭발시킬 것인가. 민주노총은 코로나19 이후 우리 사회가 회복할 힘을 노동의 권리를 지키는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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