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동안 써온 수십장의 시말서와 들었던 관리자의 욕설들. 그러다 2011년 비정규직 노조에 가입했다. 가입 동기는 ‘좀 쉬면서 일하자’였다. 비정규직지회는 2010년 최병승 대법 판결 이후 2014년 1290명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전원 승소란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그 시간 정규직지부는 무엇을 했는가?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이사장 조돈문, 소장 이남신)가 주최한 ‘2014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 당선작입니다.
생활이 너무 어려웠던 우리 가족은 내가 어릴 적 창녕에서 울산으로 이사를 왔다. 초등학생이었음에도 어머니를 도와 번데기 장사를 하던 누나, 조간신문 배달을 하던 형. 나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조간신문 배달을 했다. 매일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6시30분까지 일하고 집으로 오면 엄마가 차려 둔 밥상만이 우리 형제를 맞았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까지 5년을 학생 겸 노동자(?)로 살았다. 가족 모두가 일을 해야만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두세달에 한번이지만 고깃국도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돈이 되면 그저 노예처럼 일만 했고, 서로를 돌아볼 시간도 없었다. 13살, 세상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던 나이에 막연히 성인이 되면 일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1997년 냉동회사에 취직해 냉동차 운전을 시작했다. 나름 냉동회사의 대리급으로 인정받아 생활을 유지하던 나에게 어둠이, 아니 세상이 다가왔다. 1998년 9월 그날은 하늘도 청명해서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일을 준비하던 중 차장이 휴게실로 들어왔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차장은 밤안개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이 도망갔다”고. 그 순간 우리는 각자의 귀를 의심하며 서로를 쳐다보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다들 움직이지도, 말을 할 수도 없었던 그 정적의 순간은 잊을 수 없다. 3개월을 기다렸지만 문제는 끊이지 않았고, 사장 직함을 달았다는 이유로 어떤 형님들은 차도 빼앗기고, 법적인 처벌을 받기도 했다. 집을 담보로 차를 구입하고, 주택 대출을 받으며 이사 온 이들의 가정이,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엠에프(IMF) 금융위기. 영어는 잘 모르지만 ‘IMF’라는 글자는 내게 세상을 가르쳐줬다.
아무것도 모르는 난 다시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지만 아이엠에프 이후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소개시켜준 곳이 바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업체인 풍천기업이다. 돈이 급했기에 3개월간 정말 말없이 죽은 사람처럼 일만 했다. 일이 능숙해지고, 당시 소장과 친해지면서 나름 편한 위치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5개월 뒤 형처럼 지내던 소장이 현대자동차 관리자와 싸우고, 회사를 그만뒀다. 새로운 소장이 왔다.
한번은 잔업시간에 당시 유행하던 디디알(DDR) 게임을 연습한 적이 있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컨베이어 벨트에 차량과 차량이 지나가는 사이에 이어폰을 끼고 연습했다. 멀리서 나를 본 소장이 다가와 작업을 멈추고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사무실로 따라 들어간 나에게 소장이 내민 것은 시말서였다. 작업시간에 작업 외 행동을 하면 취업규칙 위반이라며 시말서를 작성하라는 것이다. 이후 툭하면 경고장이 날아오고, 시말서를 썼다. 소장의 모욕도 심해졌다. 다른 이들의 시급이 150원 오를 때 시말서를 작성했다는 이유로 50원만 인상되기도 했다.
억울하고 분했다. 하지만 당시 비정규직에게 힘을 주는 곳은 없었기에 정규직 노동조합을 찾았다. 몇번이나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시정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더 심한 탄압이었다. 다음날 소장이 라인에 찾아와 노동조합에 불만을 이야기 한 사람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내가 노동조합에 찾아가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정규직 노동조합에서 나에게 보내는 눈치도 심해졌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던 정규직 관리자들의 횡포도 심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자리에서 욕설을 내뱉고, 업체 관리자를 불러 또 욕을 한다. 욕이 끝나면 업체 관리자는 정규직 관리자에게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용서를 빌고 정규직 관리자는 웃으며 돌아갔다. 정규직 관리자가 떠나고 나면 본격적인 업체 관리자의 모욕이 시작된다. “너 때문에 왜 내가 욕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려면 나가라”, “정규직 관리자가 인원이 남아도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재계약할 때 몇명 줄이자는 말이 나오면 1순위는 너다”라고. 모욕감과 비참함에 견디기 힘든 하루하루였다. 한번은 회사에서 작업 불량을 줄이기 위한 장비 변경 아이디어를 공모한 적이 있다. 내가 의견을 냈을 때에는 줄곧 무시하더니 얼마 후에는 내가 낸 아이디어로 장비가 바뀌었고, 엉뚱하게도 정규직 업체품질 담당 대리가 품질혁신 포상휴가와 휴가비를 받았다. 항의했지만 묵살당할 뿐이었다. 다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수난이었다. 비정규직 앞에 펼쳐진 세상은 그러했다.
그렇게 11년을 버텼다. 11년 동안 써온 수십장의 시말서와 들었던 관리자의 욕설들. 회사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따지는 나를 같은 업체 비정규직들이 왕따 시킨 적도 있다. 그러다 결국 2011년 비정규직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2005년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후 네번 정도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렸지만 가입하지 못해 왔지만 더 이상 참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가입원서에 적은 노동조합 가입 동기는 ‘좀 쉬면서 일하자’였다. 월차를 한번 사용하려면 한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하며, 그달에 날짜가 없어 예약을 못하면 쉬는 날 없이 일해야 했고 조퇴는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사용이 가능했다. 당일 사정이 생겨 하는 조퇴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대공장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이다. 지금도 노동조합이 없는 업체에서는 이런 일들이 빈번히 일어난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이후 어두웠던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부당함을 고쳐 나가기 위해 회사와 싸우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조합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렇게 난 현대차 입사 11년 만에 근로자가 아닌 진정한 노동자로 다시 태어났다.
가입이 늦었기에 적극적으로 집회에 결합했고, 파업에도 동참했다. 그런데 며칠 뒤 집으로 내용증명서가 날아왔고, 얼마 뒤 법원 등기가 다시 날아왔다. 이전 노동조합이 3공장을 점거한 적이 있었는데 현대자동차 회사가 제시한 자료에 내가 통합사업부 부대표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평조합원이며 조합원 중에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뿐인 나로서는 억울했다. 하지만 법원은 현대차가 제시한 자료만으로 월급을 가압류했다. 월급으로 살아가는 노동자의 월급을 압류하는 것은 죽으라는 얘기다. 4인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압류당한 금액을 제외한 150만원으로 가족이 생계를 유지했다. 노동조합 전임자가 되면 임금도 나올 것이라는 지회장의 설득에 조직부장도 해보고, 부지회장도 해보았지만 현대자동차의 말 바꾸기 속에서 제대로 된 임금을 받을 수 없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어려운 결심이 무너진 순간이었지만 난 풀 죽지 않았다. 노동자를 괴롭히는 방법만 생각하는 이 땅의 자본과 권력에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결혼 후 한번도 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던 아내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상근자에서 내려오라는 얘기를 한다. 부담을 느끼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아니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버틸 수 있는 힘은 조합원들이 모아주는 해고자 생계비(평균 100만원)와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부업거리를 찾아 바쁘게 다니는 아내에게서 나온다. 큰돈이 아닐지라도 함께 가는 이들의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 비정규직지회는 가족들의 힘, 동지들의 힘으로 흔들림 없이 버티어 왔고, 2010년 최병승 대법 판결 이후 2014년 1290명이 서울 중앙지법에서 전원 승소란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현대차는 바로 항소했고, 지회는 미조직 동지들과 함께 법원에서 인정한 정규직 권리를 함께 싸워 쟁취하자는 의미로 조직화를 진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현대차는 조직사업을 시작한 2014년 10월13일부터 임원과 상집(노조 간부)의 정문 출입을 봉쇄했다. 나는 현장 출입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타 사업부라는 이유로 막았다. 신규채용 공고를 낼 시간을 벌기 위한 꼼수였다.
그 시간 동안 정규직지부에서는 무엇을 했는가? 현대자동차를 응원하는 것, 그리고 비정규직지회에서 요구하는 현장 출입을 무시하는 것. 이것이 지금의 현대차 정규직지부의 현실이다. 자본은 정규직을 압박하고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압박하는 먹이사슬이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먹이로 삼는 비참한 현실….
현대차의 탄압과 정규직 지부의 무관심으로 조직화 사업은 미비하게 끝났지만 우리는 정규직 전환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인원이 적다고, 힘이 없다고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법원도 인정한 정규직이기 때문이다!
이기용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