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사가 낸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극히 편향적이고 반민족적이며 반민주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근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논란이 일고 있으므로 전문가도 아닌 입장에서 일단 관망하기로 마음먹고 지냈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기사를 읽었다. “이같이 헌법 전문에도 있고 국가기념일로도 지정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 교학사에서 만든 고교 한국사 교과서 대단원의 주요 역사 연표에서 빠진 사실이 확인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을 본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방관할 수 없어 내 소견을 밝히려 한다. 이승만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2년도 못 가 그를 선출했던 임시의정원은 탄핵결의안을 채택해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해임했다. 1948년 제헌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12년 뒤 1960년 민중 봉기로 다시 대통령직에서 쫓겨난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19년 내무부 경무국장으로 임시정부에 첫발을 들여놓은 뒤 불과 7년 만에 내각 총수인 국무령에 선출된다. 그리고 본인의 뜻에 따라 임정 수반직에서 물러났으나 거듭 국무령이나 주석 등 임정의 수반으로 추대된다.
1945년 귀국한 백범은 1948년의 남한 단독선거에 참가하면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쟁력이 충분했다. 그러나 남한 단독선거를 하면 두 개의 나라로 분열된 채로 고착될 뿐 아니라 동족상잔의 내전도 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야인으로 지냈다. 1949년 흉탄으로 서거한 지 60여년이 지났으나 백범에 대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은 세월이 지날수록 오히려 깊어지고 있다.
새로운 한국사 교과서를 만들면서 이러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여전히 이승만이, 적어도 해외에서는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승만이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는커녕 훼방꾼이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밝히고자 한다.
1945년 4월2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회의가 열려 유엔 헌장이 채택되고 이에 따라 유엔이 창립됐다. 이 회의 참석국들은 거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쪽에 가담했던 국가였다. 특히 영토가 독일 점령 아래 있던 런던의 망명정부들도 대부분 회의에 초청되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주장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도 초청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임시정부에서는 대표단을 구성했다. 단장은 부주석인 김규식 박사, 부단장은 조소앙 외무부장, 단원은 정환범 차장으로 이들 3인은 중국 정부에서 발급한 여권도 받았으며 중국 정부로부터 경비로 사용할 달러 대부승인까지 받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는 재미 한국인 대표도 이 대표단에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재미 한인 대표로 이승만·김용중·한길수 3인을 선정했다. 이들을 임정 대표단에 합류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들 3인은 서로 반목하는 사이였으나 김용중과 한길수는 국무부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이 이들과 함께 대표단에 참여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대표단 참석이 무산됐으며 한국이 유엔의 창립회원이 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만약 이때 한국이 유엔의 창립회원국이 됐으면 개별적인 국교 수립 없이 유엔 회원국들의 승인을 자동적으로 받는 것이기에, 임시정부는 해방된 조국의 합법적인 정부로 당당하게 귀국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45년 말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 결정도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승만이 ‘건국 대통령’일 수 있는가. 그야말로 황당한 발상이다.
이 교과서가 ‘일제강점과 민족운동의 전개’라는 제목의 주요 연표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1919년’을 생략한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인하고 ‘1948년 건국절’을 강조하려는 집필진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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