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여성회 등 40개 대구지역 시민단체로 꾸려진 ‘대구광역시 인권보장 및 증진위원회 폐지 철회 인권시민단체 대책위원회’가 지난 9월21일 대구시의 인권위원회 폐지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규현 기자 gyuhyun@hani.co.kr
[왜냐면] 이석준 |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국장
10월의 마지막 날, 전국의 인권옹호자들이 한곳에 모였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3년 만의 만남이었다. 서울 회의장에 집결한 인권단체 활동가, 인권담당 공무원, 광역자치단체 인권위원회 관계자 등이 무려 140여명에 달했다. 참가자들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묵념을 하고, 이틀 동안 ‘지역인권제도화 10년, 지방자치단체 인권제도 현황과 전망’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참석자들은 한목소리로 지방정부 인권 행정의 퇴행을 걱정했다. 10년 넘게 어렵게 기틀을 다진 지역인권보장체계는 최근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대구광역시는 지난 9월 시정혁신이라는 명목으로 지자체 인권위원회를 폐지했다. 충청남도에서는 8월부터 인권기본조례와 학생인권조례 폐지 서명이 진행 중이고, 서울시에서는 주민서명을 받은 학생인권조례 폐지 청구안이 시의회에 제출됐다. 또 지난 3월 위원들 임기가 끝난 인권위원회를 반년 넘게 방치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단체장 성향에 따라 지자체 인권체계의 존폐가 결정되고 있다. 지역주민들 의사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안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이런 일이 수시로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2022년 인권옹호자회의에 참석한 인권활동가들이 이례적으로 선언문을 채택한 이유다. 지난 2일 국회 운영위의 국가인권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여러 위원이 지역인권의 퇴보를 지적했다. 이에 앞서 국가인권위원장은 9월26일 성명을 통해 우려를 표했다.
인권조례가 등장한 것은 2009년이다. 광주광역시가 제일 먼저 인권조례를 제정했고 경상남도(2010년), 서울시(2012년) 등이 불씨를 퍼트렸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2년 전국 지자체에 인권기본조례 제・개정을 권고했다. 이후 지금까지 전국 광역·기초 지자체 243곳 중 절반이 넘는 128곳이 인권조례를 만들었다. 17개 광역자치단체 모두가 인권위원회를 만들고 담당인력을 배치했다. 하지만 올해 6월 치러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인권 전담부서 축소 또는 폐지가 두드러지고 있다.
국내의 완연한 퇴조와 달리 국제사회는 지역인권을 새롭게 주목하는 흐름이다. 지자체 차원에서 ‘지방정부와 인권’ 또는 ‘인권도시운동’이 급부상 중이다. 도시화에 따른 주거 및 교통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협력과 연대활동이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기후위기 및 환경문제를 두고 지역주민운동과 인권운동이 폭넓게 결합하고 있다. 바야흐로 지역에서 인권운동의 활력을 찾아야 할 시간이다.
지자체는 사회복지, 보건, 교육, 식수, 세금 등 지역주민들의 일상생활에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는 행정서비스를 담당한다. 따라서 지역 차원의 인권보장체계가 강화되면 시민들 삶의 질도 향상된다. 바로 ‘2022년 인권옹호자회의 선언문’이 강조한 지역 중심의 인권정책 로드맵이다.
지역에서 인권을 뿌리내리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제도화다. 독립성을 확보한 인권기구를 설치하고, 지역 차원에서 조사와 상담, 교육과 홍보를 포괄하는 근거 법률을 만들 필요가 있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인권정책기본법안’은 여러 한계를 갖고 있음에도, 인권정책의 주류화 측면에서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법안은 1년 가까이 잠자고 있다.
한국은 최근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 선거에서 낙선했다. 2006년 유엔인권이사회 출범 이후 처음이다. 물론 이사국 선거 결과가 우리나라의 인권상황을 총체적으로 반영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낙선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분명한 것은 이번 결과가 한국이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어렵게 쌓아 올린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송두환 국가인권위원장은 지난 9월 아태지역 국가인권기구연합 의장에 선출됐다. 26개국이 모여 투표를 통해 한국을 선택했다. 유엔인권이사회 결과와 다른 기류인 만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역을 중시하는 국제사회의 흐름을 고려할 때, 아태지역을 기반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된 지 21년, 지역인권보장체계는 아직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한 한국이 인권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고자 한다면, 그 첫걸음은 지역인권보장체계 강화일 것이다. 요컨대 지역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인권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