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오전 11시40분께 서울 도봉구 덕성여자대학교 본관에 붙은 대자보. 박지영 기자
[왜냐면] 김동수 | 기록노동자·<유령들: 어느 대학 청소노동자 이야기> 저자
지난달 4일부터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의 점거농성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11월 시작한 교섭의 연장이다. 줄곧 시급동결을 고집해왔던 학교 쪽은 얼마 전 2026년까지 정년퇴직하는 청소노동자 12명의 후임을 새로 충원하지 않는 방안에 합의하면 노조 쪽 요구조건(시급 400 원 인상)을 수용하겠다는 조건부 수정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안대로 한다면 청소노동자들의 노동강도가 지금보다 더 세질 것이 분명하기에, 노조 쪽은 구체적인 대안 마련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라며 맞서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일부 학생들은 청소노동자들을 비난, 혐오하는 대자보와 메모지들을 써서 학내에 붙였다. ‘학생 볼모 반대한다. 하청파업 철회하라’ ‘노동자 OUT( 아웃 )’ ‘13개 대학 중 덕성여대는 최고금액 얼마나 더 지급해야?’ 등등. 모두 청소노동자들의 요구와 농성이 이기적이라고 지적하는 내용이다.
고전경제학에는 ‘개인의 이기가 사회 전체의 후생을 향상시킨다’ 는 원리가 있다. 하지만 이 원리는 모든 개인에게 골고루 적용되지 않는다. 경제주체들 가운데 노동자의 이기는 유독 불온시하기 때문이다. 고전경제학이 긍정하는 개인의 이기심이 모든 이기적인 행동까지 다 포괄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에 실생활에서는 각 주체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된다. 생산자 처지에서는 비용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최대화하는 일이, 소비자 처지에서는 질 좋고 값싼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이기적이지만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된다. 노동자의 합리적인 선택은 개선된 근로조건에서 일하는 것이지만, 노동자의 이기는 인건비라는 비용상승의 원인이 된다. 이는 가격상승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에 생산자와 소비자, 두 경제주체의 합리적인 선택에 방해될 수밖에 없다. 희소한 자원을 배분하는 문제 앞에서 노동자의 이기를 제일 먼저 배제하려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지난 9 월, 김건희 덕성여대 총장은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청소노동자들의) 임금은 학생 등록금으로 충당된다. 대학이 재정적으로 어려운 만큼 학생의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예산을 써야 한다.”
이 발언은 ‘청소노동자의 이기’(시급 인상) 탓에 ‘학생들의 이기’(학습권)가 침해받을 현실을 우려하는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학교의 이기’(시급동결)를 관철하기 위한 여론전의 일환이기도 하다. 일부 학생들이 이 여론전에 화답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사용자의 논리를 기준 삼아 자신의 이기와 반대되는 목소리를 억누르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여지는 정녕 없었을까. 청소노동자들의 점거농성은 그동안 그들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오히려 그들의 점거농성을 방치하는 건 총장의 이기심을 넘어 탐욕이 아닐까?
청소노동자 혐오 대자보와 메모지들은 어쩌면 노동자의 이기를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결과 인지도 모른다. 소수의 연세대생이 집회를 연 청소노동자들을 향해 민·형사의 책임을 묻겠다고 밝혀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뒤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징후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노동자의 이기는 초·중·고 정규교육 과정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다. 그 대신, 생산자의 이기는 기업가라면 추구해야 할 최우선의 덕목으로 칭송될 만큼 주요하게 다뤄져 왔다. 개인의 이기가 불평등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이미 학생들은 노출돼 있었다. 이런 기조는 대학 교육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학에 기업의 인재상을 터득하는 공간인 ‘일자리센터’ 는 있지만, 노동자의 인권을 대변하는 ‘노동인권센터’는 없지 않은가.
‘노동자의 이기가 사회 전체의 후생을 향상시킨’ 사례들(노동운동의 역사)을 지금이라도 가르친다면, 이러한 현실이 바뀌게 될까? 교육의 효과는 단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당장의 효과를 기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더군다나 노동자의 이기가 지금 당장 정규 교과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가능성도 거의 없다. 지난 9일 교육부가 발표한 ‘초·중등학교 및 특수교육 교육과정’ 행정예고 안에서 노동교육은 교육목표로 명시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사용자의 시선에서만 바라보도록 학습된 노동자의 이기가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인 비난과 혐오의 대상으로 비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귀결 아닐까? 대학 청소 ‘노동자들’이 근로조건 개선 요구를 멈추지 않는 한, 한동안 학생 ‘소비자들’의 비난과 혐오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