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전후석 | <헤로니모> 감독, <당신의 수식어> 저자
어떤 작품은 예고편만 봐도 설렐 때가 있습니다. 한달 전, 애플티브이플러스 시리즈 <파친코>의 예고편을 보고 그랬습니다. 너무 소중하여 아껴두었다가 보고 싶은 심정이랄까요. <파친코> 그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저는 어떤 시사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한인 디아스포라가 그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거주국에서 제작한 뒤 한국 모국에 소개하는 ‘시점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파친코>는 한국-일본-미국에서 펼쳐지는 자이니치(재일동포) 4대의 가족사를 다루는 대서사 드라마입니다. <파친코> 원작은 일본에 몇년간 머무르던 재미한인이 썼고, 감독 두 명과 제작자 역시 재미한인, 배우들도 대부분 재미, 재일동포 등이 주를 이룹니다. 더군다나 세계적인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기업 애플티브이플러스가 직접 투자·제작·배급을 맡아 내놓은, 올해 가장 야심작 중 하나가 바로 재미동포들이 만든 재일동포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진정 경이롭지 않나요.
하지만 최근 <파친코>를 케이-컬처(K-Culture), 케이(K)-드라마의 하나로 보도하는 기사들을 보며 살짝 불편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물론 <파친코>의 기본 배경과 역사가 한반도인 것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저는 단순히 한국과 연관이 있는 모든 서사에 대해 무조건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는 감정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한국적인 것은 한국의 것이다”라는 무비판적인 대명제에 딴지를 걸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 심리의 이면에는 근본적으로 디아스포라의 존재와 그들의 세계관에 대한 무지, 혹은 그들을 ‘이야기하는 주체’가 아닌 ‘변두리의 객체’로 인식해온 오랜 관습 등이 작용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유대계 미국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작품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 홀로코스트가 더 잘 알려졌다고, 혹은 이탈리아계 미국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를 통해 이탈리아 마피아의 존재가 유명해졌다고, 각각 이스라엘과 이탈리아가 저 작품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듯, 한인 디아스포라 창작자들이 갖고 있는 창작관과 그 작품들은 온전히 ‘그들의 것’일 겁니다. 여태껏 한반도 바깥 세상의 ‘동포’로만 여겼던 이들이 이제는 디아스포라적 콘텐츠를 직접 이야기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사실 재외동포들은 이미 예전부터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작년 화제가 되었던 <미나리>, 조선족의 이야기를 다룬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두만강>, 재일동포 양영희 감독의 <디어평양>, 100여명의 입양인들을 인터뷰해 다큐멘터리로 만든 글렌 모리 감독의 <사이드 바이 사이드> 등 사실 정말 많은 문학과 영화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요. 앞으로는 디아스포라의 스토리가 국외 자본, 국내 창작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세계와 공유되는 크로스오버가 더 많아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재일동포, 재중동포, 고려인, 북향민, 남미 한인, 입양아는 물론, 대한민국에 이주해 온 다른 디아스포라의 존재와 그들이 갖고 있는 스토리를 대한민국이 ‘사유화’하려는 노력의 부질없음을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더 이상 한국적인 것들이 한국만의 것이 아닐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을 자각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동질적이면서도 이질적이고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디아스포라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한반도 문화의 저변과 사유의 깊이는 더 확장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