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착 31년째인 재일동포인 이명호 아루센 대표는 10년 전 신종플루에 이은 코로나19의 팬테믹을 통해 인류가 공존의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며 자신이 개발한 소독제를 동포 사회에 나누고 있다. 사진 아루센 제공
일본에서 코로나19 확산세가 절정에 이른 지난달 중순 도쿄에 있는 재일동포 기업인이 한글학교·한인교회·재외공관·조선학교 등에 자사에서 생산한 항바이러스 소독제 2천만원 어치를 기부했다는 소식이 알려져 눈길을 끌었다. 앞서 그는 지난 2월에도 중국인과 재중 한국인, 조선족 동포들을 위해 중국 산둥성 옌타이시에 자사의 소독제 8천만원 어치를 지원했다. 세계한인무역협회 상임이사인 이명호(52·사진) 아루센 대표였다.
“코로나19로 한 단계 높은 살균 기능성 제품 등 위생 관련 산업이 앞으로 주목받을 겁니다. 이미 제가 개발한 암소이온촉매제를 원재료로 다양한 소독·방역제품의 수요도 크게 늘고 있어요.”
지난 주말 에스앤에스(SNS)로 연결된 이 대표의 첫 마디였다. 그런데 그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놀라운 기시감이 느껴졌다. 꼬박 10년 전인 2010년 4월 그는 첫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2009년 겨울부터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신종플루(인플루엔자 바이러스 A형)가 ‘코로나19’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1989년 근로장학생으로 일본 유학
주경야독하며 24살때 첫 창업해 접고
화학이론 독학 ‘암소이온촉매제’ 개발
2008년 ‘아루센’ 설립해 소독제 생산
중국 옌타이시에 공장…연매출 800억
일본·중국 동포에 소독제 기부 선행
최근 일본 군마현 아즈마군보건소에 소독제를 전달하고 있는 이명호 대표. 사진 아루센 대표
“그때 제가 무슨 대단한 예언을 했던 게 전혀 아니고요, 이미 바이러스와 더불어 살아가는 시대가 됐다는 뜻이죠. 머잖아 우주여행시대가 열리면 더 많은 미지의 물질들이 유입될 수밖에 없어요. 이제는 ‘공존’과 ‘면역’이 지구촌 사회의 화두가 될 겁니다.”
최첨단 화학물질 업체 대표인 그가 이처럼 인문사회학적인 전망을 하는 게 조금은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의 남다른 이력을 들어보니 이해할 만 했다.
그는 1968년 전남 승주에서 나서 순천에서 자랐다. 전남 장성 출신인 부친과 경북 달성이 고향인 모친 사이에서 4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그는 부모의 이혼 와중에 고교를 중퇴하고 일찍이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여수~서울 고속버스의 차장으로 일하다 상경한 그는 리어카를 끌고 노점상을 하다 성수동의 한 섬유업체에 취직했다.
“그런데 공장에서 쉬는 시간에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찢어버리고 공부를 못하게 해 그만뒀어요. 신설동의 작은 독서실에서 먹고 자며 검정고시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요미우리신문>에서 신문배달 근로장학생을 선발한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때부터 독학으로 일어를 공부해서 선발시험에 합격했죠.”
그렇게 일본으로 건너온 그는 1989년 지바현 가시와시에 있는 사립대 레이타쿠대학에서 문화인류학(언어학과)을 공부했다. 갖가지 아르바이트로 주경야독하던 그는 재학 중이던 24살 때 미리내(은하수)종합상사를 설립해 첫 사업을 시작했다. “한인 유학생 전용 기숙사, 구두 위탁가공 무역 등으로 제법 성공했는데 점점 경쟁이 치열해져 그만뒀어요.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사업을 찾다가 독학으로 화학이론을 연구한 끝에 ‘소독제’를 발견했지요.”
그는 티타늄을 공부하다 알게 된 기후현 기후국립대의 화학전문가 니나가와 연구원과 손을 잡고 2년 만인 2005년 세계 최초로 암소이온촉매제를 개발할 수 있었다. 복합금속물질인 암소이온촉매는 동·은·티탄·아연을 이온화해 만든 일종의 소재물질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일반적인 산화철 종류와 달리 빛이 없는 어두운 공간(암소)에서도 작용해 향균, 탈취에 탁월한 효과와 지속력을 지녔죠.”
지난 4월13일 도쿄 우에노 재외국민투표소에 소독제 기부하고 있는 이명호(맨왼쪽) 대표. 사진 아루센 제공
2008년 아루센(일본말 ‘아루(있다)’와 한국말 ‘세다(센)’의 합성어)을 창업한 그는 기술력을 인정받아 코마리요·돈키호테(레오프론티아)·니치만 아다스트토리아 등 신발업체에 연간 200만 켤레분의 촉매제를 납품했다. 사업 초기 공기정화제·세라믹필터·정수기 등의 친환경제품 수요가 급증한 덕을 보기도 했다.
“일반적인 손 소독제는 알콜이 주성분이라서 피부에 바른 뒤 15초가 지나면 증발해버리죠. 바이러스가 30%는 살아남아요. 암소이온촉매제는 증발하지 않아 1분 뒤 98.8%, 10분 뒤에는 100% 소멸시킵니다. 우리 제품으로 30차례 세탁해도 쓸 수 있는 반영구적 마스크를 개발한 업체도 있어요.”
이명호 대표가 일본 총련계 조선학교에 보낸 마스크, 항바이러스제 등 코로나19 방역제품. 사진 아루센 제공
2010년 인터뷰에서 “올해 10억엔(120억 원 정도) 어치를 판매하고, 5년 뒤에는 100억 엔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던 그는 10년 만에 옌타이에 세운 중국 아루센에서만 연매출 800억원을 돌파했다고 전했다. 올들어 코로나19로 개인 방역 수요가 급증하자 아루센은 휴대용 스프레이 타입도 생산하고 있다. 현재 월 4만개를 생산해 ‘돈키호테' 등 대형 양판점에 납품하며 중국시장 진출도 채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까지 한인 동포사회 30여 곳과 총련계 조선학교 4곳에 마스크·항바이러스 살균제·휴대용 소독제 등을 지원했어요. 특히 일본 정부로부터 차별받고 있는 학교의 교장과 교사들이 눈물 어린 감사의 전화를 해줘 오히려 제가 감동했죠.”
이국땅에 와서 누구보다 어려움을 겪어봤기에 늘 초심을 잃지 않고자 ‘수행하는 마음’으로 동포들을 돕고 있다는 그는 “기회가 되면 북한 동포들에게도 소독제나 방역품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