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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중정의 “한민통은 반국가단체” 연출에 공안검사 춤추다

등록 2018-12-15 09:51수정 2018-12-15 11:18

[토요판] 한통련은 서럽다②
반국가단체 40년 족쇄

1977년 김정사 사건 초기에는
“한민통 문제 전혀 나오지 않아”
중앙정보부가 자수간첩 내세우며
‘한민통=반국가단체’ 몰이 시작돼

대사관 파견 정보부요원 활용해
총련 무관한 한국계 한청 간부를
비밀공작원 만든 영사증명서 꾸며

재일동포들의 통일운동 단체인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은 지난 40년 동안 반국가단체로 규정돼 있어 여권 발급에 차별을 당하는 등 한국 정부로부터 많은 억압과 냉대를 받고 있다. 손형근 한통련 의장(오른쪽)과 김지영 재일한국민주여성회장이 11월22일 오후 일본 도쿄의 지요다구에 있는 한통련 본부 사무실에서 자신들이 발간하는 <민족시보>와 <민주여성> 등 출판물을 가리키고 있다. 도쿄/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재일동포들의 통일운동 단체인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은 지난 40년 동안 반국가단체로 규정돼 있어 여권 발급에 차별을 당하는 등 한국 정부로부터 많은 억압과 냉대를 받고 있다. 손형근 한통련 의장(오른쪽)과 김지영 재일한국민주여성회장이 11월22일 오후 일본 도쿄의 지요다구에 있는 한통련 본부 사무실에서 자신들이 발간하는 <민족시보>와 <민주여성> 등 출판물을 가리키고 있다. 도쿄/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 재일동포들의 사회단체인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이 40년째 반국가단체로 묶여 있다. 1973년 결성된 한통련은 한번도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내걸지도 행동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조국에 의해 반국가단체라는 낙인이 찍혀 여권 발급 등 각종 차별과 억압을 당하고 있다. 김대중 당시 야당 지도자와 함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만들어진 단체가 어떻게 해서 반국가단체가 되었는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길을 가다가 알지도 못하는 옆 사람과 함께 수사기관에 끌려가서 그 사람의 범죄 배후로 찍히면 어떨까. 더구나 옆에 있던 사람 역시 잘못을 저지르거나 법을 위반한 적이 없다. 수사기관이 건수를 올리고, 정권이 시민들을 겁주기 위해서 힘없고 약한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으로 죄인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수사기관이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조작했던 사실이 드러나고, 피해 당사자는 다시 재판을 받아 무죄를 받았다. 그러나, 배후 조종자로 찍힌 사람은 그때 받은 오명을 뒤집어쓴 채 여전한 감시와 차별을 당한다. 법치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불행하게도 사실이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고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을 해온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이 그 당사자다.

한통련(1989년 한민통에서 이름 바꿈)에게 반국가단체라는 무시무시한 딱지가 처음 붙은 것은 40년 전인 1978년이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막바지로 치달을 때였다. 그해 6월 대법원(재판장 정태원, 주심 이일규)이 재일동포 유학생 김정사(당시 서울대 사회계열 1년·63)에게 간첩 혐의로 징역 10년을 확정한 직후였다. 판결은 6월13일이었는데 언론 보도는 6일이나 지나서야 나왔다. 당시 언론들은 일제히 “대법원이 한민통(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은 반국가단체라는 판결을 내렸다”면서 “△한민통의 조직 자체가 북괴의 지령에 의한 것이고 △한민통 의장 김재화 등 구성원 성분이 북괴에 가서 지령을 받은 공작원이거나 조총련의 지령을 받은 자들이고 △공작금도 김일성의 직접 지시에 의해 거액을 지원받고 있”다(<동아일보> 1978년 6월19일)고 보도했다.

“한민통 반국가단체 안 된대서 실망했는데”

그러나, 당시 대법원의 판결문 어디에도 한민통이나 반국가단체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다. 판결문에는 김정사의 간첩 혐의와 관련해 “진술과 영사증명서 등으로 볼 때 범죄사실을 넉넉하게 인정할 수 있고, 증거 취사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만 적혀 있을 뿐이다. 판결문에 없고, 재판과정에서도 전혀 논란이 되지 않았던 반국가단체 규정을 언론들은 어떻게 뒤늦게 알고 일제히 썼을까.

단서는 당시 기사에 들어있다. 다른 신문은 그냥 대법원 판결 내용인 듯 보도했지만, <동아일보>는 “검찰의 한 공안관계자”가 “설명했다”고 출처를 밝혔다. 아마 검찰 공안부의 간부 검사였을 것이다. 그가 김정사 사건에 의미부여를 하고, 언론들은 받아적기를 했을 것이다.

물론 그 공안검사가 언론 설명 때 ‘한민통=반국가단체’ 규정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1심 재판부(재판장 허정훈, 배석판사 정용인·김황식)의 판결문에 김정사의 혐의를 나열하면서 밑도 끝도 없이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라고 표현한 대목이 한 군데 있었기 때문이다. “북괴 및 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지령에 의거 구성되고 그 자금 지원을 받아 그 목적 수행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인 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간부 겸 공작지도원인 임계성(당 27세)의 강연을 듣고, 동인과 인사 교환하여 위 한민통의 간부인 것을 알게 되고…(후략)”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검찰의 공소장(담당 검사 정경식)에 들어가 있는 문장 그대로였다. 당시 철저한 보도 통제가 있기는 했지만, 언론들은 1심 판결 뒤에 이 사건이나 문구에 대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물론 공안검사의 ‘설명’도 없었다. 엄청난 무게를 지닌 이 문장은 은근 슬쩍 1심 판결문에만 들어간 뒤 2심이나 3심 판결문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중앙정보부와 군 보안사, 검찰 등 공안기관들은 아주 잘 짜인 각본대로 움직였다. 보안사(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전신)가 김정사 등 재일동포 유학생 4명을 1977년 4월에 붙잡아와서 수사할 때는 한민통에 관한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보안사 수사단계에서는 유영수(1977년 4월 육군포병학교장 박승옥을 찾아가 평화통일에 앞장서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건넸다가 보안사에 체포. 동생 유성삼과 동생 친구 손정자, 김정사도 불법 구금됨)가 핵심이고, 김정사는 곁가지였다. 사건 초기 검찰에 가서 의견을 들었는데 한민통이 반국가단체가 아니라서 사건이 안 된다고 해서 실망하기도 했다.” 김정사를 수사했던 보안사 수사관 고병천이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국방부과거사위)의 김정사 사건 조사(2007년)에서 한 진술이다.

이른바 ‘거물간첩’이라는 윤효동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김정사 사건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윤효동을 무대에 세운 것은 보안사가 아니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였다. 중앙정보부는 김정사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기 이틀 전(77년 5월28일)에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에서 활동했다는 ‘거물간첩’ 윤효동(1926~1996)을 등장시켰다. 북한에 네 차례나 갔다왔다는 윤효동은 “한민통과 김대중구출위원회 등은 북한의 지령을 받는 간첩집단이며, 한민통의 조직국장 곽동의는 자신이 북한에 보내 간첩교육을 받게 했다. 한민통은 북한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일본에서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는 단체와 주요 인물은 모두 북한 간첩이라는 것이었다. 뒷받침할 근거나 증거가 하나도 없는 주장이었지만, 그의 기자회견은 각 신문과 방송에 대서특필됐다.

곽동의에 대한 자수간첩 윤효동의 거짓말

기자회견이 끝이 아니었다. 그의 본격적인 쓰임새는 두 차례의 재판정이었다. 윤효동은 김정사의 1심 재판 막바지인 77년 10월 느닷없이 법정에 검찰 쪽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김정사와도, 김정사가 일본에서 만났다고 진술했던 한청 간부 임계성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윤효동이라는 사람이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인데 이 재판에 왜 나오게 되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였으며, 또한 곽동의, 배동호, 즉 한민통은 제 사건과 관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재판 과정에서 이러한 말이 오가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보안사 수사과정에서는 일체 한민통에 대한 수사를 받았던 적이 없고, 말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재판정에서 그들과 연관지으면서 왜 그들에 대해 설명하는지 의아했던 것으로 기억난다.”(김정사, 진화위 진술조서, 2008년 9월24일) 윤효동은 다섯 달 전 기자회견에서 했던 주장, 즉 ‘곽동의는 자신이 북한에 데리고 가서 교육을 받게 했고, 한민통은 총련의 자금으로 운영된다’ 등의 말을 법정에서 다시 한번 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윤효동의 법정 등장이 갖는 의미를 몰랐지만, 그의 이 증언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근거로 활용됐다.

윤효동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80년 10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다루는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 법정에도 또 나타났다. 여흥진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한 윤효동은 “한민통은 총련과 내밀한 관계에 있다”며 비슷한 내용의 주장을 다시 했다. 윤효동의 이러한 증언은 일방적인 주장이었을 뿐 아무런 증거자료나 물증이 없었음에도 법원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인정하는 근거로 삼아, 김대중에게 반국가단체 수괴 혐의 등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중앙정보부는 윤효동이 1977년 5월1일 자수해 왔다고 기자회견 때 밝혔지만,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 조사 때 발견한 ‘윤효동의 중앙정보부 자필진술서’에는 1976년 4월19일로 기록돼 있다. 최소한 1년 이상 묵혀두고 있었던 윤효동을 등장시켜 한민통 잡기에 나섰던 것이다. 이런 연출은 보안사 수사에 대한 조정과 승인 권한을 가진 중앙정보부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물론 윤효동의 핵심적인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곽동의(2017년 사망)를 북한에 데려가 간첩교육을 시켰다는 1970년 4~5월에 곽동의는 일본에 있었다는 여러 증거가 있다. 그해 4월10일 민단(재일대한민국민단)의 도쿄본부 지방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발언한 회의록이 대표적이다. 1980년 일본 중의원 외무위(11월5일)에 출석한 일본 출입관리국 관계자도 “1970년 1월1일부터 그해 말까지 곽동의 고문의 출입국 기록이 없다”고 확인했다.

김정사의 1심 재판 때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몰아간 또다른 근거는 영사증명서였다. 주일 한국대사관에 파견돼 있던 중앙정보부 요원 정락중이 작성했다. 그는 김정사가 도쿄에서 만났던 한청 간부 임계성에 대한 영사증명서(1977년 8월24일)에서 “임계성은 1970년 4월부터 불순계열인 베트콩(당시 민단 비주류 개혁파를 칭하던 별명)의 행동단체인 구 한청 중앙본부 선전부장에 취임한 이래 동 단체의 조직부장과 동경본부 부위원장 요직을 겸임하면서 한민통의 조직원임과 동시에 간부로 활동 중임. 동인은 반국가단체인 조총련과 비밀리에 연계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북괴를 직접 왕래하면서 간첩 활동 중인 곽동의 등의 조종 하에 반국가 활동을 주도하고 반국가단체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종사하고 있음”이라고 적었다. 석 달 전 윤효동이 기자회견에서 주장했던 곽동의 방북설 등이 그대로 담겼다.

정락중은 1980년 7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판 때도 한민통에 대한 영사증명서를 제출했다. 이 영사증명서는 한민통의 결성 배경과 결성과정, 활동상황, 자금, 주요 구성원의 성분 등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지만, 윤효동 주장의 판박이였다. “(한민통에 관한) 영사증명서의 내용과 관련하여 대사관에 관련 자료가 있었고, 그것은 내가 일본으로 나가기 전부터 있던 자료들이며, 그 자료를 바탕으로 종합한 것일 뿐 내가 직접 수사나 내사를 통하여 작성한 것이 아니었다.”(정락중, 진화위 진술서, 2009년 7월9일)

“한민통 주축 곽동의 북한 데려가
간첩 만들고 한민통 만들게 했다”고
자수간첩 윤효동은 엉터리 법정증언
법원은 정보부의 날조된 근거 수용

판결 6일 뒤 공안검사가 기자들에게
“한민통은 반국가단체됐다”고 설명
40년 동안 한통련 족쇄채운 출발점

김정사 무죄…한통련은 여전히 ‘유죄’
‘한통련 명예회복’ 엠비정권 때 무산
“인권위 조사·대통령 결단해야” 촉구

한민통(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은 민주화가 이뤄진 뒤인 1989년 이름을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으로 바꿨다. 곽동의 한통련 초대 의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통련 20년 운동사>
한민통(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은 민주화가 이뤄진 뒤인 1989년 이름을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으로 바꿨다. 곽동의 한통련 초대 의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통련 20년 운동사>
“언제라도 ‘한민통=반국가단체’ 만들어야 했다”

정식 외교문서도 아닐 뿐더러 공적 증거로서의 법적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지만, 법원은 1977년에도 1980년에도 추가 확인도 없이 이를 그대로 증거로 받아들였다. 정보기관의 이러한 영사증명서 장난질에 제동이 걸린 것은 2007년 12월 이른바 ‘일심회’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 때였다. 대법원은 주중국 대사관의 이아무개 영사가 작성한 영사증명서에 대해 “목적이 공적인 증명에 있다기보다는 상급자 등에 대한 보고에 있는 것으로서 엄격한 증빙서류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당연히 증거능력이 있는 서류라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직접 수사나 내사를 통해 작성되지 않았던 영사증명서는 당연히 대부분 내용이 엉터리였다. 임계성에 대한 성분 분석이 대표적이다. 정낙중의 영사증명서는 1977년부터 임계성을 “총련과 비밀리에 연계해서 활동”하는 인물이라고 단정했지만, 실제로는 그는 당시 총련은 물론이고 한민통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당시 저는 ‘한청’에서만 활동했고 ‘한통련’에서는 활동한 적이 전혀 없다. ‘한청’은 재일한국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는 곳이었고 ‘한민통’은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는 활동을 주로 하는 다소 정치적인 조직이었다.”(임계성, 진화위 진술서, 2008년 3월17일) 민단(재일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의 간부를 지냈던 인사들도 국방부과거사위 조사에서 임계성이 한민통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고 한결같이 증언했다. 재일동포 사회에 조금만 확인해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기에 임계성을 한민통 나아가 총련과 연관시킨 것은 중앙정보부 본부의 지침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검찰, 보안사 등 공안 당국은 오래 전부터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보안사 수사관 고병천은 국방부과거사위 조사에서 “김정사의 재일공작지도원 임계성은 한청 소속이고, 한청은 한민통의 산하단체가 아닌가. 당시 한민통은 언제, 누구라도 반국가단체로 만들어야 했었다. 유학생 사건 및 우회 간첩 사건에서 한민통이 자주 등장했다. 김정사 사건을 통해 반국가단체가 될지 기대만 했었다”(국방부과거사위 ‘김정사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고 말했다.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기만 하면 재일동포 유학생 등을 간첩으로 만들기는 식은 죽먹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안당국은 1967년 재일동포 김재화(신민당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의 외환관리법 위반 사건과 양일동(전 국회의원·통일당 당수)의 반공법 위반 사건 때 배동호, 곽동의 등 민단 비주류 핵심인사를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 몰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법원(서울형사지법)은 1969년과 1975년의 각 판결에서 “배동호, 곽동의 등은 반국가단체 구성원이 아니”라고 판시했다.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 단체가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민통은 그들이 내건 규약과 정강정책 어디에서도 “정부를 참칭”한 적이 없으며,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내용을 언급한 적이 없다. 한민통의 정강정책(1977년 8월13일)은 “파쇼적인 일인독재체제를 타도하고 헌정질서를 회복한다”는 것을 필두로 △민주민권 보장 △부정부패 일소 △굳건한 국토방위태세 확립 등을 내걸었다. 반박정희 구호는 될지언정 반국가 문구는 어디에도 없다. 결성 10주년을 맞아 1983년에 채택한 ‘한민통 제2선언’에서도 “△외세의 지배와 간섭 배제 △파쇼독재 타도 민주연합 정부 수립 △자주적 평화통일 성취” 등을 목표로 삼았다. 한민통의 실제적인 활동 역시 김대중 구출 및 석방, 유신 반대 시위 등 민주화운동이 대부분이었다.

1978년 ‘검찰 공안관계자’가 “한민통은 반국가단체가 됐다”고 선포한 이후 법원은 한민통(한통련)과 관련된 판결을 쓸 때는 1977년 김정사 사건 1심 재판부의 판결문을 그대로 낭송하고 있다. “반국가단체로서 약칭 한민통으로 불리우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일본 본부의 구성원들이 한민통을 발전적으로 개편하여 그 명칭만을 한국민주통일연합으로 변경, 한통련 역시 반국가단체라고 아니할 수 없다”(대법원 1997년 7월16일, 선고 97도 985)는 판결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04년 10월10일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정식 여권을 발급받고 귀국한 김정부(오른쪽에서 세번째) 한통련 의장이 도착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북한 간첩이라는 누명을 썼던 곽동의 상임고문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2004년 10월10일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정식 여권을 발급받고 귀국한 김정부(오른쪽에서 세번째) 한통련 의장이 도착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북한 간첩이라는 누명을 썼던 곽동의 상임고문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반국가단체 규정은 부당” 무산된 보고서

그동안 ‘한통련=반국가단체’란 족쇄를 풀기 위한 노력과 기회가 몇차례 있었다. 노무현 정부 때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가 처음으로 한통련 문제를 풀려고 진지하게 노력했다. 명예회복을 해달라는 한통련의 요청(2006년 11월)이 있자, 진화위는 조사에 착수해 2010년 5월 최종 보고서를 작성했다. 진화위는 이 보고서에서 “한민통의 주요 활동 내용은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과 비민주정치에 대한 반대, 민주적 제반 권리 요구, 조국통일과 재외동포 권리 향상 등으로, 이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정당한 항거로 볼 수 있다”면서 1977년 법원 판결이 허술하게 이뤄진 점, 한민통의 규약이나 정강, 활동 내용이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은 점 등을 지적한 뒤 “한민통에 대한 반국가단체 규정은 부당하므로 이를 시정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진화위 전체회의에서 기각됐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교체된 위원장(이영조)을 비롯한 보수적 위원들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민통의 이적성 여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기본법’에 규정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표결로 보고서 채택을 무산시켰다.

두번째는 2011년에 개시된 김정사 사건에 대한 재심(재판장 황한식) 때였다. 김정사 사건은 한통련(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만든 출발점이기 때문에 잘못 끼워진 단추를 풀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은 김정사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한통련의 성격 규정이라는 본질적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았다. 재심 변호사였던 이인람(기욱에서 개명)은 지난 11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김정사 재심을 한통련의 명예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과정으로 생각하면서 재판에 임했다. 이를 위한 각종 자료를 제출하고, 변론 과정에서도 그 부분을 숱하게 강조했다. 그러나 법원은 형식논리 뒤에 숨은 채 한통련의 반국가단체 문제를 교묘하게 피해가더라”고 말했다.

법원이 스스로의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외면하는 바람에 한통련 문제를 법적으로 풀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한통련 구성원이 피고인으로 재판받은 적이 없어 재심을 청구할 수가 없다. 한통련 구성원에 대한 여권 발급 차등에 대해 한통련이 행정 소송이나 헌법 소원을 제기하는 우회적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법원과 헌법재판소가 한통련 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김정사 재심에서 보듯 법원은 형식 논리 뒤에 숨을 공산이 크다.

1980년 12월 김대중 당시 야당 지도자에 대한 사형 집행을 막기 위해 한민통 간부들이 일본에서 결사단식단을 구성해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통련 20년 운동사>
1980년 12월 김대중 당시 야당 지도자에 대한 사형 집행을 막기 위해 한민통 간부들이 일본에서 결사단식단을 구성해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통련 20년 운동사>
“과감한 정치적 결단 필요”

이에 따라 독립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를 통한 해결을 모색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통련이 반국가단체로 지정돼 여러 차별을 받고 있으므로 당연히 인권위가 조사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인람은 “한통련 구성원의 대부분은 우리 국적을 가진 국민들이다. 한통련이 반국가단체로 규정돼 있는 바람에 한통련에 적을 둔 국민들은 출입국 등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등 기본적 인권을 침해당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인권위 조사를 요구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정치적으로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2003년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 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지낸 임종인(전 국회의원)은 “당시 한통련 귀국을 추진할 때 국정원에서는 반성문을 먼저 써야 한다는 등 온갖 방해를 했다. 그럼에도 노무현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 무조건적인 귀국과 그들에 대한 각종 차별 철폐 조처를 내렸다”며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민정수석으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만큼 과감하게 정치적 결단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종인은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에게 상과 자리를 주지는 못할 망정 차별을 하고 있는 것은 우리 양심의 문제”라며 “남북관계와 경제 등 풀어야 할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문제에도 대통령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안 풀린다”고 덧붙였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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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안 하고 왜 체포부터?”…윤석열 사법처리에 헷갈리는 일본 언론 5.

“구속 안 하고 왜 체포부터?”…윤석열 사법처리에 헷갈리는 일본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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