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이뤄낸 성과는 전세계 차원에서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을 자각해야 해요.” 도쿄 북쪽의 나가노현 지노시 인근 휴양지 거처에서 만난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는 “한국은 강대국들을 대변하는 열강의 아류도 될 수 있지만, 식민지배 등으로 유린당한 동서의 중간지대를 비롯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제3세계)의 대변자가 될 수 있다. 그럴 만한 힘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 “한국인들은 세상이 놀랄 만큼 치열하게 싸웠고 엄청난 걸 이뤄냈다.” 촛불혁명과 대통령 탄핵, 그리고 대선으로 이어진 숨가쁜 드라마 이후 만난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는 갓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 큰 기대감을 표시했다. 서 교수는 일본 사회의 퇴행을 매우 우려하면서, 문재인 정부가 동아시아의 열린 미래에 빛이 되어주기를 소망했다.
“정말 좋았다. 한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문재인 후보의 압승으로 끝난 한국의 대통령선거 결과를 서경식(66) 도쿄경제대 교수는 반겼다. 대선 이틀 뒤인 지난 11일, 김포발 도쿄행 전일본항공(ANA) 항공기 내 일본 공영방송 <엔에이치케이>(NHK) 영상뉴스는 한국 대선 관련 소식을 머리기사로 전하면서 문재인 정부가 “반일” 정권이라는 야릇한 자막을 띄웠다. 서 교수는 우파 아베 신조 정권이 계속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일본, 자신이 ‘재앙’이라고 얘기해온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등장, 그리고 그들과 알력을 빚고 있는 시진핑의 중국, 사드 강행배치로 더욱 삐걱거리는 한-중, 남북 관계 속에 “한국 보수우파가 재집권했다면 얼마나 무서운 상황이 벌어지겠느냐”며 “참으로 다행”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도 재외동포 자격으로 이번 대선 때 한 표를 행사했다. “내가 투표를 해 본 건 2012년 한국 대선 때다. 난생처음이었다. 한국 민주화 덕이었다. 우리(재일동포·자이니치)는 지난 60여년 세월 동안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살아왔다. 한국에선 요즘 정주 외국인에게도 지방선거 참정권을 주는데, 일본에선 아직도 바뀐 게 없다. 1990년대 말 오부치 게이조 정권 때 자이니치들에게 참정권을 주는 쪽으로 당시 김대중 정부와 얘기가 됐고 하토야마 유키오와 간 나오토의 민주당 정권 때도 논의는 있었으나 아베 정권 이후엔 그런 얘기 자체가 아예 사라져버렸다.”
일본의 극우단체 회원들이 2013년 3월 도쿄의 한인타운 거리에서 혐한 시위를 벌이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도쿄 간다 서점가 장악한 ‘혐한론’ 책들
도쿄 북쪽의 나가노현 지노시 인근 휴양지.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에서 ‘인권과 마이너리티(소수자)’ 과목을 강의해온 서 교수는 요즘엔 도쿄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이곳의 거처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다. 매주 화·목·토 사흘간 90분짜리 강의 5개에다 3년 전부터 예술론 강의도 맡으며 집필 등에도 쫓겨온 그는 최근 과로로 인한 어깨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이 자이니치들에게 작으나마 문을 열어주었는데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다시 닫아버렸다. 문재인 정부가 다시 열어주기 바란다.” 서 교수 자신은 한국적을 취득했지만, 다수의 재일 조선적 동포들은 지금 사실상 한국 출입을 거부당하고 있다. 조선적은 북한 국적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남북 긴장을 완화하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정책을 계승해주기 바란다. 그래야 내 후배 세대 자이니치들이 길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이 달라지면 재일 조선인 사회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우리 삶은 한국이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과거사 청산과 여성 지위 향상, 친환경, 약자 배려, 국가보안법 폐지(개정) 등을 추진했는데 이명박·박근혜 정부 등장과 함께 미완으로 끝났다.” 서 교수는 “국정교과서 폐지도 너무 잘한 일”이라고 반겼다.
“아베 정권이나 그 정책에 대한 비판은 일본 국가나 국민에 대한 비판과는 명백히 다른 것인데, 왜 그게 반일인가?” 서 교수는 거대 중국의 대두와 주변국들의 성장 등으로 일본의 기존 위상이 흔들리고 불안감이 조성되면서 과거사는 잊은 채 약자·피해자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반일’이란 말의 유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봤다. 서 교수는 또 지금의 일본 우파 정권이 자민당 장기집권체제를 일시 무너뜨린 1990년대 초보다 더 부패했다는 지적이 많다며, 모리토모학원 비리처럼 과거엔 내각 총사직으로 이어졌을 이런 ‘국정농단 비리’들이 저질러지고 있는데도 제대로 된 비판은커녕 성과가 의심스러운 아베노믹스와 아베 정권 인기가 오히려 올라가는 일본 현실에 대해 “불가사의하다”고 했다. “반일이란 말 하나로 비판자들을 입 닫게 만들고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려 내부 단합을 꾀한다. 온건한 비판조차 ‘나는 반일주의자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전제로 깔아야 할 만큼 전체주의적 기운이 만연했다. 세계가 전체주의·파시즘과 맞서 싸워 이겨낸 지 70여년 만에 그 사상적 유산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5월13일치 <아사히신문> 조간 1면 하단 광고란에는 “화제 비등, 중판 대발행! <정말 겁나는 한국의 역사>”라는 문구의 책 광고가 실렸다. 1면 아래 5단 광고란을 책 광고로 채우는 오랜 전통을 지켜온, 일본의 지적·문화적 자부심의 지표였던 <아사히신문>조차 “일본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질투와 불만 가득찬 한국인의 정신성, 잇따른 대통령과 거대재벌 비리 그 원인은 한국이 걸어온 역사 속에 있다”는,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무장한 자극적인 문구를 그대로 내보냈다. 5월14일치 <아사히신문> 조간 3면 하단의 “<유교에 지배당한 중국인과 한국인의 비극>(고단샤)”이라는 5단 책 광고는 더 노골적이다. ‘공해대국을 낳은 중국인의 발상, 한국인은 왜 노벨상을 받을 수 없는가, 세계가 비난하기 시작한 중국과 한국’ 따위의 편견과 ‘친일국가를 만든 일본인의 근면함, 일본인의 도덕규범은 무사도’ 따위의 유치한 우월의식을 대비시키고, “미국인은 중국을 상거래 상대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인은 벗(友人)입니다”라는 저급한 문구까지 달았다. 책의 저자는 켄트 길버트라는 미국인. 이런 요상한 책이 “11주 연속 중판에 28만부를 돌파, 기노쿠니야 서점 베스트셀러 일본 국내부문 1위, 서적조합 신서부문 랭킹 1위”를 기록하고 있단다.
“도쿄 간다 서점가에서 가장 크고 권위 있는 서점인 산세이도 건물에 오차노미즈 방향으로 내건 대형 책 광고판이 있는데, 일본 책 광고의 상징일 뿐 아니라 문화적 상징이기도 했다. 몇년 전부터 그 광고판에 혐한론 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는 책 광고도 걸렸다. 지금 진열대에 책 표지가 위로 향하도록 쌓아두고 파는, 잘 팔리는 책들 다수가 그런 유의 책이다. 역사적 산물인 한국의 특성이나 고유성을 인종적 특성으로 희화화·고착화하고 멸시·모욕하는 저급한 책들인데, 북에 관한 책들은 물론 남에 관한 책들 다수가 그런 부류의 책들이다. 그런 책들이 잘 팔린다는 얘기다. 일본에서 태어나 60년 넘게 산 나도 일본 사회가 이렇게까지 퇴락한 건 처음 본다. 일본 출판계 내부에서도 한탄할 정도다.”
“아베 체제는 과거 회귀 욕망의 산물”
일본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보수 일간지 <요미우리신문>은 한국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을 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포퓰리즘적 영합, 사회의 미성숙 탓으로 돌렸다. 햐쿠타 나오키라는 우익작가는 북의 미사일 발사 실험 뒤 가족이 희생될 경우 일본 내 적들을 섬멸하겠다고 공언했고 그 글엔 수많은 ‘좋아요!’가 쇄도했다. 전쟁과 가미카제 특공대를 미화했다는 논란 속에 500만부 가까이 팔리고 만화·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영원의 제로>를 쓴 햐쿠타는 아베 총리의 측근으로, 문재인 정부를 ‘반일’로 규정한 <엔에이치케이> 운영위원을 역임했다. 난징 대학살은 역사적으로 근거없는 것이라 주장하는 햐쿠타를 명문 히토쓰바시대 학생회에서 초청해 발언권을 주면서 언론·표현의 자유를 들먹였다며 서 교수는 혀를 찼다. “조선인 죽여라” “조선 여성은 강간해도 된다”고 공언했던 우익 재특회 규제법이 지난해 국회를 통과했지만 처벌 규정이 없어 그들의 횡포는 줄지 않고 있다고 한다.
테러 등 중대범죄를 사전에 계획만 해도 처벌하는 테러대책법안(조직범죄처벌법 개정안, 공모죄법안)도 중의원(하원)을 통과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도구였던 치안유지법을 연상시키는 이 법이 시행되면 카메라를 들고 관광 다니다 붙잡혀 고초를 당할 수도 있단다. 2020년 도쿄올림픽 때까지 개헌작업을 완료하겠다고 공언한 아베 정권의 목표 달성이 “순탄치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라고, 이해에 정년퇴직하는 서 교수는 내다봤다.
서 교수는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던 2015년의 12·28 합의를 그대로 밀고 가는 것은 “장기적으로 양국 모두에게 역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평가했다. “피해 당사자들 얘기도 들어보지 않은 ‘합의’는 당사자들의 만족 여부를 떠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과거 일본이 저지른 과오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해서 앞으로 올 세상을 위한 교훈으로 삼지 못하는 한 최종적 해결이 될 수 없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독일처럼 기본법을 만들어 나치즘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전범자들을 자발적으로 처벌하면서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보상하는 조처를 취해야 한다. 그것이 주변국과 피해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요 기본자세다.” 독일은 하켄크로이츠를 없앴고 이탈리아도 국기를 바꿨다. 그럼에도 일본은 국기(히노마루)와 국가(기미가요), 천황제를 그대로 뒀고, 최근엔 젊은이들이 일제 해군기인 욱일기를 스포츠 경기장에 들고나와 응원도구로 쓰는 역행이 계속되고 있다. 우익은 일본의 전후 고도성장이 모두 옛 체제의 우수성 덕택이라고 믿는 듯 과거로의 회귀를 추구하고 있다. “아베 체제는 그런 욕망의 산물”이라고 서 교수는 말했다.
“20세기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등 러시아와 독일 사이의 중간지대에서만 1500만명의 민간인이 살육당했다. 전통과 다민족이 어우러지는 평화공존을 내걸었던 사회주의적 이상은 나치와 스탈린 체제의 폭압에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냉전 붕괴 뒤 신자유주의의 강풍 속에 기초연금 체제가 파탄 나고 올리가키 등 정상배들이 판을 치는 가운데 자살률이 치솟고 다수 대중의 삶은 처참하게 파산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그런 희망 없는 깜깜한 시대의 상징이다.” 지난해 서 교수가 만난 벨라루스의 노벨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그 피투성이의 세월을 직시하면서 특히 여성 등 마이너리티들의 고난을 여실하게 그려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의 역사이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 겪어온 우리의 역사가 그러했다. 유럽의 그 중간지대처럼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도 무수한 민초들이 살육당하고 추방당한 대륙과 해양세력 사이의 중간지대다.”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에서 ‘인권과 마이너리티(소수자)’ 과목을 강의해온 서경식 교수는 요즘엔 도쿄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나가노현 지노시 인근 휴양지 거처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다.
“한국인들, 치열하게 싸워 엄청난 걸 이뤄내”
서 교수는 아베 정권의 불길한 우편향 행보와 미국 트럼프 우파정권의 등장, 중국과의 갈등, 남북대결 심화 등을 목도하면서 그 비극이 다시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예감을 갖게 된 듯하다. “헨미 요의 <1★9★3★7>(이쿠미나)에서도 보듯 그 비극의 가해자였던 일본은 지금 과거의 죄업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 악의적 고의는 아니겠지만, 모든 것을 형편 되어가는 대로 내맡기는 일본적 풍토 속에 ‘전쟁할 수 있는 일본’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 아무런 저항이 없다. 패전을 겪고서도 일본은 바뀐 게 없다.” 아베 정권과도 밀접하게 얽혀 있는 일본 우익의 총본산이라 할 ‘일본회의’가 과거로의 회귀에 앞장서고 있다. 그런 풍토에 경종을 울리던 소수 지식인들조차 1960년대를 끝으로 거의 자취를 감췄단다. “지금 그런 말을 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지경이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 이래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근본적으로 국가노선을 수정해본 적이 없다. 언제든 정권교체가 일어날 수 있는 사회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지배세력 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사회에서 변화를 싫어하는 강고한 관료체제와 비대해진 기득권층에 저항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문재인의 민주당이 집권한 한국이 한줄기 희망의 빛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국인들은 세상이 놀랄 만큼 치열하게 싸웠고 엄청난 걸 스스로 이뤄냈다. 그 성과는 전세계 차원의 보편성을 지닌 것임을 알아야 한다. 조선민족의 역사적 위치도 특이하다. 한국은 강대국들을 대변하는 열강의 아류도 될 수 있지만, 식민지배 등으로 유린당한 동서의 중간지대를 비롯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제3세계)의 대변자가 될 수 있다. 그럴 만한 힘도 갖고 있다.”
서 교수는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열린 나라가 되기를 소망했다.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고 그것을 토대로 세계에 새로운 메시지를 발신하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 한반도 안보를 위해서도 그게 유리하다. 먼저 남북관계를 터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남북대화 의지에서 희망을 본다. 통일도 꼭 하나의 이념과 체제로 통합해 강대국을 만드는 길만 있는 건 아니다. 마이너리티와 다양성을 죽이는 반인권적, 비인간적 상황을 해소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든 동원당하고 이용당하게 된다. 우리는 더욱 지혜로워야 한다. 이 디아스포라적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서 교수는 26~30일 인천에서 열리는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참석한다.
도쿄/글·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