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낭인’이라는 말과 처음 조우한 건 명성황후 암살 사건에 대한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쓰노다 후사코의 <민비암살>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에서 일본 육군 소좌(소령) 출신인 오카모토 류노스케(1852~1912)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은 민간인 신분으로 일본 정부가 배후에서 주도한 명성황후 암살(1895년)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처럼 뚜렷한 공적 지위 없이 한반도, 만주, 중국 등을 오가며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해 활동했던 이들을 ‘대륙낭인’이라 부른다.
이들이 처음부터 명확한 목적의식을 갖고 움직였던 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일본의 국익을 관철하기 위해 조선의 내정에 간섭했고, 이 과정에서 한 나라의 왕비를 살해했고, 결국 조선을 강제 병합하는데 일조한다.
해방 이후에도 일본은 자국의 이해에 따라 한국의 국가이익을 규정한 뒤 다양한 공식·비공식적 루트를 통해 수많은 훈수와 압박을 가해왔다. 일본과 한국 군사정권 사이의 흑막에서 활동한 이들이 고다마 요시오, 세지마 류조와 같은 일본 우익 인사들이었다. 특히 이토추 상사의 회장직에까지 오르게 되는 세지마는 공직자가 아니었지만, 전두환 시대 한국 군사정권과 일본 정부를 연결하는 후원자 역할을 했다.
세지마는 광주학살로 들끓어 오른 한국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책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겐 서울올림픽 유치,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보수대연합을 통한 내각제 개헌 등을 조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의 우익이 한국의 군사정권을 지원한 이유는 하나였다. 냉전 시기 공산세력에 맞서 일본을 지키는 든든한 방파제로 한국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였다.
지난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결정에 대한 일본 언론들의 보도 태도도 이와 비슷하다. 일본 보수를 대변하는 <요미우리신문>은 12일 박 전 대통령의 파면을 확정한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해 “헌재가 대통령 파면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소리에 아첨해 권력을 행사한 것이라면 지나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한-미-일 3각동맹 심화, 사드 배치 결정 유지, 12·28 합의 존중 등을 요구했다. 일본 입맛에 맞게 한국의 국가이익을 규정한 뒤, 간섭하고, 훈수 두고, 파면 결정이 내려지자 짜증을 내는 듯한 태도다.
아베 신조 정권은 이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의 새 정권이 박근혜 정권의 외교·안보 정책을 수정하려 들 경우 다양한 보복 조처를 쏟아낼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언론들의 ‘대륙낭인’스런 보도를 보며, 한-일 관계의 본질은 100여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통감한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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