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다는 아베가 일본인 납치 문제를 매명 행위에 이용하고 있다고 줄곧 비난하고 있었다. 분노가 절정에 이른 어느날, 부관방장관실에 쳐들어와 아베의 눈앞에서 ‘이놈’하고 책상을 발로 차버렸다고 한다.”(<슈칸분슌(주간문춘)> 최근호)
지난 12일 쫓기듯이 권좌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 아베 신조(53) 일본 총리와 후임 총리가 확실시되는 후쿠다 야스오(72) 전 관방장관. 유력 정치 가문의 2세 의원에다, 아버지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늦깎이 정치인, 자민당 같은 파벌인 세이와정책연구회(마치무라파) 소속 등 공통점이 많다. 그렇지만 두사람의 정치 스타일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두사람은 지난 5년 동안 격렬한 투쟁을 세차례나 치렀고, 지금은 ‘견원지간’으로 불릴 만큼 둘 사이에 패인 골이 깊다.
후쿠다 △1936년생 △부친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 △와세다대(경제학) △1990년 중의원 첫 당선 △관방장관 역임
두사람의 ‘악연’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집권시절이던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 방북과 북-일 평양선언은 당시 관방장관이던 후쿠다와 다나카 히토시 아시아대양주국장의 합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한 뒤, 두사람의 갈등이 공공연히 노출되기 시작됐다.
김 위원장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아베 당시 관방부장관은 비등한 반북 여론을 등에 업고 북-일 협상에 급제동을 걸었다. 그는 북한과의 합의를 깨고 일본에 일시 귀국한 납치 피해자 5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못하게 막았다. 북-일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 다나카와 뒤에서 힘을 보태주고 있던 후쿠다는 격분했다. 후쿠다는 외무성과 미국 등을 통해 아베에게 기밀정보가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으려 애쓴 것으로 전해졌다. 반격에 나선 아베는 당시 파벌회장이자 후견인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에게 “저 사람 밑에서는 일을 못하겠다. 부장관을 그만두겠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등 후쿠다 몰아내기에 나섰다고 한다. 이후 아베는 자민당 간사장으로 중용됐지만, 후쿠다는 2004년 5월 연금미납 파동의 와중에서 관방장관직을 그만둬야 했다.
두번째 대결은 지난해 고이즈미 총리의 후임을 뽑는 자민당 총재 선거 과정에서 벌어졌다. 모리 전 총재는 당시 후쿠다를 옹립하기 위해 아베를 주저앉히려 애썼다. 참의원 선거 패배가 예상되는 만큼 아베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아베와 거센 반발로 수포로 돌아갔다. 아베는 모리가 후쿠다 얘기를 꺼내자 “그렇다면 파벌을 탈퇴하고서라도 출마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후쿠다는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로 일본내 반북 감정이 한층 악화되자 출마를 포기했다. 그가 아베와 함께 총재 자리를 다투게 되면 아버지(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가 만든 파벌이 깨질지 모른다고 우려했다는 말도 들린다.
세번째 싸움은 7·29 참의원 선거 자민당 참패에서 지난 12일 아베의 돌연 사임 발표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벌어졌다. 아베가 총리직 사임의 타이밍을 놓쳐 두고두고 욕을 먹는 것은 후쿠다를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그는 ‘후쿠다 카드’를 들이미는 모리 전 총리 등 당내 실력자들의 권고를 거부했다. 대신 “여기서 물러나면 안된다”는 아소 다로 외상의 말을 받아들여 총리직 유임을 선언했다. 8월27일 당정개편이라는 미봉책을 내놓으며, 정치적 동지가 된 아소를 간사장에 임명해 자신의 후임자임을 분명히 했지만 결국 동반 침몰하고 말았다.
후쿠다는 마침내 자신이 주창해온 ‘기다림의 미학’으로 권력을 쥐게 됐다.‘신중거사’라는 별명답게 지나치게 소극적 행보를 보여온 후쿠다는 ‘후쿠다 대망론’에 동참한 여러 파벌의 추대 형식으로 총재 선거에 나섰다.
남에게 고개숙이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자들의 접근을 피해 왔던 그는 최근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젊은 기자들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식사에 초대하고 있다고 한다. 길거리 연설에서도 적극적 몸짓으로 대중에 다가가려 애쓰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대중정치인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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