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필사적으로 촬영에 저항했지만,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키는 대로 응해버려요. 그 순간 모든 감각이 없어져버립니다.”
20대 초반 여성 아키코(가명)는 거리에서 모델 제의를 받았다. 회사는 그에게 계약서를 제시하며 서명을 요구했다. 어떤 회사인지 미심쩍기도 했지만, 계약서를 썼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처음엔 간단한 촬영을 했다. 머리 손질과 화장 비용은 모두 회사가 부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는 성인물을 촬영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아키코는 “계약서에 그런 내용이 없다”고 맞섰다. 회사는 거절하면 그동안의 비용에 계약 파기에 대한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 협박했다. 계약서가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20대 여성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아키코는 촬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 응하고 나니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촬영된 성인비디오(AV) 영상은 당사자의 동의 없이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무한정 유통됐다.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는 ‘굴레’로 피해 호소도 쉽지 않았다. 일본 시민단체인 ‘포르노 피해와 성폭력을 생각하는 모임’(PAPS)에서 상담을 받은 성인비디오 피해자의 사례다.
일본 국회는 15일 참의원 본회의를 열어 성인비디오와 같은 성 관련 동영상의 촬영·유통으로 발생하는 피해를 막기 위한 ‘성인비디오 출연 피해 방지·구제법’을 통과시켰다. 성인비디오에 출연한 이들의 피해 구제를 처음 명문화한 법률이다. 일본의 성인 시장 규모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2014년 현재 일본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10분의 1인 46조9763억엔(약 450조5천억원)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2016년 야노경제연구소)가 있다.
이 법의 핵심은 출연자의 나이·성별에 관계없이 영상이 공개된 뒤 1년 동안 ‘무조건’ 계약 해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계약에 법적인 하자가 없어도 법률이 적용된다. 또 시행과 함께 특례를 적용해 시행 2년까진 2년 동안 무조건 계약을 해지할 수 있게 했다. 제작업체는 출연자가 계약 해지를 요구해도 손해배상 등을 청구할 수 없고, 영상 회수와 삭제 등 원상회복 조처도 취해야 한다. 제작자가 계약 해지를 하지 못하도록 출연자에게 허위 내용을 전달하거나 위협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만엔 이하의 벌금, 제작자가 속한 법인에는 1억엔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새 법은 출연자가 촬영 내용이나 영상의 유통으로 발생할 위험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계약부터 촬영까지 1개월, 촬영부터 유통까지 4개월의 숙려 기간을 두는 것도 의무화했다. 또 영상을 찍거나 유통하는 쪽은 사전에 촬영 내용을 설명하고, 출연자가 누구인지 특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명기한 계약서를 출연자에게 반드시 전달하도록 했다.
일본에서 성인비디오 관련 법이 제정된 직접적 계기는 지난 4월 성인 연령이 20살에서 18살로 낮아지면서다. 스스로 계약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 18~19살 청소년의 성인비디오 피해가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커지자 여야가 함께 법안을 추진했다.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성인비디오로 인한 피해 사례가 광범위하고 심각하다는 점이 부각돼 연령·성별에 상관없이 적용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다만 일부 피해자 지원 단체와 여성단체에선 법안을 두고 ‘합법적인 성매매’를 인정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10대 여성들을 지원하는 단체인 ‘콜라보’의 니토 유메노 대표는 “근본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성인비디오 촬영에 있어 성행위를 금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법안에는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우려 때문에 법안에는 ‘시행 뒤 2년 이내 검토를 통해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겠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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