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이 13일 한때 달러당 135.22엔 부근까지 하락해 1998년 이래 24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일본 엔화 가치(엔-달러 환율)가 24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하는 등 ‘엔저’ 흐름이 가속화되면서 일본 경제 사정이 악화하고 있다. 원유·곡물 등 세계적인 원자재 가격 급등에다 엔저까지 겹치면서, 일본 중소·영세 기업과 가계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 가치는 13일 한때 달러당 135.22엔 부근까지 하락해 1998년 이래 24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14일 오후 3시29분 기준 달러당 134.5엔에 거래됐다. 지난 3월1일 115.07엔에서 3개월여 만에 20엔이나 떨어졌다.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은 이날 각료회의(국무회의) 뒤 기자회견에서 “급속한 엔화 약세의 흐름을 우려하고 있다”며 “외환시장 동향과 경제·물가 등에 대한 영향을 더욱 긴장감 있게 주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엔화 가치가 급격하게 하락한 것은 미국의 5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예상보다 높아 미국 연방준비제도 (Fed)가 기준금리 인상에 속도를 낼 것이라는 전망이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일본 경제에 타격을 줄 ‘나쁜 엔저’ 흐름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인플레이션에 맞서 금리 인상에 나서고 있지만, 일본은 ‘제로금리’ 정책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 7일 “강력한 금융 완화를 끈기 있게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의 산업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가 확대되면 엔저 흐름을 막기 힘들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내상이 심각한 중소·영세 기업은 엔저로 원자재 수입 비용이 추가로 상승하면서 벼랑 끝에 몰려 있다. 조사업체 ‘데이코쿠데이터뱅크’ 자료를 보면, 지난달 전국의 기업 도산 건수는 517건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12.1% 늘었다. 이 수치가 늘어난 것은 2020년 7월 이후 1년10개월 만이다. 도산 업체 대부분이 중소기업이다.
도쿄에서 9곳의 ‘100엔숍’을 운영하는 ‘프로디아’는 누리집에 “이달 1일부터 매장 전부 폐점한다”고 알렸다. 폐점에 따른 재고 정리 안내문이 붙어 있다. 프로디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갈무리
저렴한 상품만 파는 ‘100엔숍’이나 목욕탕, 세탁소 등 중소·영세 업체들의 폐업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도쿄에서 ‘100엔숍’ 9곳을 운영하는 ‘프로디아’는 누리집에 “이달 1일부터 매장 전부 폐점한다”고 알렸다. 16년 동안 도쿄 분쿄구에서 프로디아의 점포를 운영한 점장은 <아사히신문>에 “올해 들어 업체들의 가격 인상이 잇따르면서 대부분의 상품 가격이 올랐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말했다. 100엔으로 팔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지난 4일 문을 닫은 도쿄 나카노구에 있는 목욕탕의 사장은 이 신문에 “코로나로 이용자가 줄어 가뜩이나 힘든데, 연료비 등이 올라 버티기 힘들었다”며 “마지막은 가스비를 내기 위해 장사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도쿄에선 매달 목욕탕 1~2곳이 폐업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식품·전기·가스·교통·외식 등 소비자물가도 전방위적으로 오르고 있다. 데이코쿠데이터뱅크 조사를 보면, 이달 기준으로 기업 105곳이 라면·식용유·음료 등 6285개 품목의 가격을 올렸다. 7월 이후에도 3000개 이상의 상품 가격이 오를 예정이다. 지난 4월 일본 소비자물가지수는 2.1%(신선식품 제외) 올라 2015년 3월(2.2%) 이후 7년 1개월 만에 최고치로 집계됐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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