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첨단 스텔스기 F-35. 유럽 배치 미국의 전술핵을 실어 나를 항공기로 사용될 예정이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라는 점을 내세워 반세기 넘게 ‘비핵 3원칙’을 지켜온 일본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식 ‘핵공유’ 논의가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이번 논의가 한·일을 포괄하는 핵확산 움직임으로 이어지면, 중국과 북한을 자극해 본격적인 ‘핵 경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회적 금기’로 여겨진 핵 관련 논의의 첫 물꼬를 튼 이는 아베 신조 전 총리였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나흘째인 지난달 27일 <후지 티브이>에 출연해 “세계의 안전이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 현실에 대한 논의를 금기시해서는 안 된다”며 “독일과 네덜란드는 미국의 핵무기를 공동 운용하고 있다. 일본도 다양한 선택사항을 시야에 두고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나토 회원국에 ‘전술핵’을 배치해 이들 나라와 공동 운용하는 핵공유 방식을 일본도 검토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미국은 현재 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벨기에·터키 등 나토 회원국 5개 나라에 전술핵 B61을 100여기 배치해 놓고 있다. 미군이 관리하지만, 투하 임무는 나토 회원국 공군이 맡는다. 유사시 워싱턴에서 ‘긴급행동 메시지’ 발신코드를 보내면, 유럽 주둔 미군이 이를 수신해 진본인지 확인한 뒤 전술핵에 발사코드를 입력하고 나토 회원국에 넘기는 것이다. 핵공유란 이름은 이런 독특한 운용 방식에서 기인한다.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의 수장인 아베 전 총리가 ‘핵공유’ 논의의 봉인을 풀자,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정조회장은 “비핵 3원칙의 하나인 ‘반입하지 않겠다’에 대해 예외를 둘지 논의를 해야 한다”고 동조했고, 아베 전 총리의 ‘정치적 맞수’였던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도 “검증 없이 비핵 3원칙을 계속 유지하는 것만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당내 2인자인 모테기 도시미쓰 간사장도 핵무기를 일본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시 사용할지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구조라면 ‘비핵 3원칙’에 즉각 위배된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일본 주요 정치인들이 핵공유 관련 논의에서 언급한 ‘비핵 3원칙’이란 일본은 ‘핵무기를 제조하지 않고, 보유하지 않으며, 반입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뜻한다.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가 1967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이 원칙을 처음 언급했고, 일본 중의원 본회의에서 1971년 11월 ‘일본 정부는 비핵 3원칙을 준수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후 일본에서 이 정책은 하나의 국시처럼 반세기 넘게 유지돼 왔다. 일본이 미국과 핵공유를 한다면, 3원칙 가운데 ‘반입하지 않는다’ 부분을 수정해야 한다.
핵공유 논의가 이어지자 원폭 피해를 입은 히로시마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비핵 3원칙을 견지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 (핵공유는) 인정할 수 없다”고 선을 확실히 그었다. 하지만 당내 공론화 움직임이 거세지며 10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선 “핵전력 공유에 대해 자민당뿐만 아니라 여러 정당이 논의를 하고 있다. 이런 국민적 논의는 있을 수 있다”고 한발 뒤로 물러선 상태다.
이후 본격적인 당내 논의가 시작된 모습이다. 자민당 안전보장조사회는 16일 이와마 요코 정책연구대학원대학 교수 등 안보 전문가를 초청해 핵공유를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일단 이 모임에선 부정적인 견해가 쏟아진 것으로 전해진다. <산케이신문>은 “회의에 참석한 안보 전문가들은 미국 핵무기를 자국 내 배치해 공동 운용하는 일부 나토 가맹국과 일본은 상황이 다르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고 전했다. 안보조사회는 5월까지 이 문제에 대한 제언을 정리해 기시다 총리에게 전달할 방침이다.
시민사회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오쿠보 겐이치 ‘일본반핵법률가협회’ 회장은 <도쿄신문>에 “핵 위협에 핵으로 대항하려고 하면 일본을 위험한 방향으로 이끌게 된다”며 일본은 “유일한 전쟁 피폭국인 만큼, 비핵 3원칙을 국시로 정한 배경을 되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핵공유 논의에 물꼬를 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그는 “독일과 네덜란드는 미국의 핵무기를 공동 운용하고 있다. 일본도 다양한 선택사항을 시야에 두고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이 별로 반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제임스 쇼프 전 미 국방부 동아시아정책담당 수석 고문은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일본의 핵공유를) 좋은 아이디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워싱턴에서는 극소수파일 것이다. 특히 (조 바이든) 정부 내에서는 없을 것”이라며 크게 세 가지 이유를 꼽았다. 첫째, 미국이 제공하고 있는 확장억지(핵우산)가 강력하고, 둘째, 미국이 본토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과 일본에 배치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 사이에 별 차이가 없으며, 셋째, 일본 배치를 현실화하는 과정이 복잡하다는 것이다. 니시다 미치루 나가사키대학 교수도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미국이 일본에 제공하는 핵 억지력은 빠르고 멀리 날아가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 중심”이라며 “핵을 미국이 동맹국에 대량 배치하는 시대는 사라졌다. 나토형은 일본의 경우 억제력 향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베 전 총리가 모델로 든 나토의 핵공유는 미국과 유럽 회원국이 핵 사용을 공유하고 ‘공동 책임’을 진다는 취지로 구상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운용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 의미가 과대 포장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애초 나토식 핵공유는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유럽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나왔다. 1950년대 말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미국이 소련의 핵보복을 무릅쓰고 유럽을 위해 핵단추를 누를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난 것이다. 유럽은 핵무기 사용을 공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요구하고 나섰고, 논의 결과 현재와 같은 핵공유 체제가 마련됐다.
나토 핵공유 체제에서 최고 협의기구는 1966년 창설된 ‘핵계획그룹’이다. 나토 회원국 7개 나라의 각료급 인사로 구성된다.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 등 4개국이 상임 참가국이며, 나머지 3개국이 돌아가며 비상임 참가국을 맡는다. 핵계획그룹은 매년 1~2차례 각료회의를 열어 핵의 군사적 활동과 관련한 나토 차원의 정책을 조율하고 지침을 협의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실제 이런 공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사실상 유명무실했다는 지적이 많다. 황일도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교수는 2017년 ‘동맹과 핵공유’라는 논문에서 유럽 내 전술핵의 작전 운용과 배치 장소 등과 관련해 “모두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해 집행했고 핵계획그룹을 비롯한 나토 협의체는 이를 추인했을 뿐”이라며 “미국은 애초부터 핵 사용 결정권이 미국 대통령의 독점적 권한이라는 인식이 강해 애초 이를 유럽과 공유할 뜻이 없었다”고 밝혔다. 예컨대, 미국이 발사코드를 넘기지 않으면 유럽은 이를 사용할 수 없다. 유럽은 한때 어떤 조건이 되면 코드를 넘길지 미리 정해두자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핵 사용 결정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유럽 배치 전술핵의 군사적 실효성이 떨어진 것도 핵공유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1950년대 말 이후 미·소 양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전략핵을 본격 개발·배치하면서, 전술핵은 소련에 대한 핵억지력의 역할을 전략핵에 넘기게 된다. 이후 전술핵은 소련에 비해 뒤떨어진 재래식 전력을 보완하는 무기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소련 해체 이후 첨단무기의 발달로 미국과 나토는 재래식 전력에서 러시아를 압도하게 됐다. 실제 2010년이 되자 독일·네덜란드·벨기에 등에선 유럽 배치 전술핵의 무용론을 주장하며 철수를 요구했다. 그럼에도 나토가 핵공유 정책을 유지한 것은 정치적 상징성이 크고, 핵무기 철수가 미국의 핵우산 공약 약화로 해석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민감한 폴란드와 발트3국 등에서 철수에 반대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
북한이 2020년 10월 노동당 창건 75돌 기념 열병식에서 공개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노동신문 누리집 갈무리, 연합뉴스 자료사진
나토식 핵공유는 한국에서도 국민의힘 의원들을 중심으로 제기돼 왔다. 이번 대선 때도 홍준표 의원과 유승민 전 의원 등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미국과 나토식 핵공유 협정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은 1991년 한국 배치 전술핵을 모두 가져간 뒤에도 한국에 대한 핵우산 공약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국내 배치됐던 전술핵이 수행했던 임무는 이제 주로 미국 본토에 주둔한 전투비행단의 임무가 됐다. 예컨대 노스캐롤라이나주 시모어 존슨 공군기지의 제4전투비행단은 1998년 전반기 북한을 대상으로 핵 타격 연습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위기의 순간마다 한반도에 모습을 드러내는 오하이오급 전략핵잠수함(SSBN)이나 B-2 장거리폭격기 등도 한반도 핵 타격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핵공유 주장이 나오는 것은 북한의 핵이 고도화하는 만큼 핵무기 사용에 대한 한국의 발언권을 높여 핵우산에 대한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한계가 드러난 핵공유 체제가 한국의 발언권을 얼마나 보장해줄지는 의문이다.
핵공유가 일본의 비핵 3원칙에 어긋나는 것처럼 1992년 1월 남북 간에 체결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많다. 공동선언은 1조에서 “남과 북은 핵무기의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배비·사용하지 아니한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로 이 선언이 사실상 무효화한 만큼 구속될 이유가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북핵 포기를 요구하는 법적·도덕적 근거로 유효한 만큼 폐기해선 안 된다는 반론도 많다.
우려되는 것은 한·일의 핵공유가 북한과 중국의 반발을 불러 동북아 안보지형에 큰 파고를 불러올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은 핵실험 재개에 나설 가능성이 높고, 중국도 300기 안팎인 핵탄두 수를 늘리는 등 핵능력을 확충할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에서 ‘핵 경쟁’이 벌어지면서 군사적 긴장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도쿄/김소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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