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국가비상사태청(한국의 재난안전관리본부)은 4일(현지시각)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던 중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주 에네르호다르시 원전 부지 내 ‘훈련용 시설’에서 불이 났다”고 밝혔다. 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의 교전이 벌어지는 곳 근처에 있는 유럽 최대 원자력발전소에서 4일(현지시각) 새벽에 불이 나, 자칫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 원전에서 사고가 나면 1986년 체르노빌 참사보다 피해가 “10배는 더 클 것”이라며 자제를 요구했지만, 결국 러시아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발전소를 내줬다.
우크라이나 국가비상사태청(한국의 재난안전관리본부)은 4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던 중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주 에네르호다르시 원전 부지 내 ‘훈련용 시설’에서 불이 났다”고 밝혔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자료를 내어 “화재가 원전의 ‘필수 장비’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우크라이나 당국이 통보해 왔다”고 전했다. 양쪽 간 교전으로 우크라이나 소방관들이 한때 현장 접근을 못하다, 새벽 6시40분께 불을 껐다. 러시아군은 3일 남부 거점 도시 헤르손을 장악한 뒤 북진 중이다.
이번에 불이 난 건물은 원자로를 포함한 원전 핵심 시설들과 불과 300여미터 떨어져 있다. 미국·유럽 수준의 안전설비가 갖춰져 있지만, 무차별적인 포격이 이어지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 탱크들은 적외선 장비를 갖추고 원자력 지역을 공격했다. 자신들이 무엇을 쏘는지 알고 있었다”고 비난했다.
화재 주변 지역을 분석한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한겨레>에 “위성사진을 보면, 우크라이나군 쪽이 위치한 사무실 건물 뒤편에는 스위치 야드로 불리는 변전시설이 있고, 러시아군 탱크 쪽 뒤편 오른쪽 끝에는 사용 후 핵연료 건식저장시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어느 쪽 방향의 공격이든 원전 안전에 위험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변전시설이 손상되면, 원전에 전력 공급이 차단돼 핵연료 냉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수 있다. 또 사용 후 핵연료 저장시설이 파괴되면 방사성물질이 대량으로 방출되는 재앙으로 이어진다. 미야노 히로시 전 호세이대 객원교수(원자로 시스템학)는 <요미우리신문>에 “이 원전은 노심이 콘크리트 구조물로 둘러싸여 있어,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같은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시설 손상 정도에 따라 방사성물질 유출은 있을 수 있다. 관측 데이터를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옛 소련 시절 인류 최악의 원전 사고라 일컬어지는 체르노빌 참사를 함께 겪었다.
이날 화재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자포리자 원전은 우크라이나에서 가동 중인 원자로 15기 중 6기를 보유한 유럽에서 가장 큰 원전이다. 우크라이나가 사용하는 전력의 4분의 1을 공급하며, 세계 10대 원자력발전소 중 한 곳으로 꼽힌다. 국제원자력기구는 6기 모두 옛 소련이 개발한 가압경수로(PWR)로 1980~1990년대 건설돼 가동됐다고 밝혔다.
불이 난 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은 트위터를 통해 남긴 메시지에서 “폭발이 일어난다면 피해가 체르노빌보다 10배는 클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러시아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세를 이어가 발전소를 점령했다. 원전을 운영하는 국영 원자력공사 에네르고아톰은 성명을 내어 ”발전소 내 행정동과 검문소가 점령군의 통제 아래 있다. 원전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도록 발전소 직원들은 업무를 계속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불행히도 발전소 내에 죽거나 부상당한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