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의 상징과도 같은 금 채굴 현장이었던 브이(V)자 산봉우리 ‘도유노와레토’ 모습. 사도시 누리집 갈무리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강제동원이 대규모로 이뤄졌던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놓고 한-일 외교전이 본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이 어떻게 대응할지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의 유산적 가치를 에도시대로 좁히고, 강제동원을 반박하기 위해 임금 등 처우에 대한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한다는 방침이다.
14일 <마이니치신문> 보도를 보면, 일본 정부는 지난 1일에 이어 10일 사도광산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진행했다. 내각관방에 설치된 티에프에는 총리 관저, 외무성, 문부과학성, 문화청 등이 참여했다. 두 차례 회의에서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 등재 실현 전략을 마련하고, 각 부처의 작업 방향과 진척 상황을 점검했다.
일본 정부는 우선 유산을 평가하는 ‘시대 설정’에 공을 들일 예정이다. 1467년에서 1989년(폐광)이라는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 중 에도시대(1603~1867년)로 평가 기간을 좁혀, 이 시기에 이뤄진 전통적 수공업 방식의 금 생산 체제를 부각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조선인 강제동원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던 1939~1942년을 빼버리겠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은 유네스코에 “한국은 당사자가 아니다”라고 설득할 예정이다.
이는 일본이 이미 2015년 ‘하시마’(군함도)가 포함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때 써먹은 방식이다. 당시 조선인 강제동원을 의식해 1850년대부터 1910년까지 시기를 강조했지만 유네스코는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석 전략’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사도광산의 경우 하시마 때와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마이니치신문>에 “산업혁명유산은 대상(23곳 중 7곳 강제동원 이뤄짐)이 많았기 때문에 역사 전체를 설명하라고 했지만 사도광산의 대상은 제한적이다. 그 가치도 16~19세기에 한정된다”고 말했다.
일본은 유네스코가 시기 설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해 ‘플랜비(B)’도 마련하고 있다. 조선인 강제동원을 반박하기 위해 임금, 수당, 복지혜택 등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다는 증거를 수집하겠다는 생각이다.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은 12일 정의용 한국 외교부 장관과 첫 대면 회담에서 사도광산 강제동원과 관련 “한국 쪽의 독자적인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사도광산에서 1939년 2월부터 약 1200여명의 조선인 강제동원이 이뤄졌다는 사실은 구체적 자료와 피해자 진술도 남아있다. 특히 일본 지방정부인 니가타현이 1988년 펴낸 <니가타현사 통사편8 근대3>에는 “1939년에 시작된 노무동원 계획은 명칭이 모집, 관 알선, 징용으로 바뀌지만 조선인을 강제로 연행한 사실은 동질”이라고 밝히고 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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