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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푸틴 정적’ 독극물 중독에 소환되는 러시아 ‘독살 잔혹사’

등록 2020-08-21 10:38수정 2020-08-21 12:01

옛 소련 때 KGB 요원들에 의해 활용
푸틴 체제 정적·비판자들 많이 희생돼
독일·프랑스 “나발니, 모든 지원하겠다”
한 러시아 시민이 20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가에서 열린 야당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를 지지하는 시위에서 “독은 여자, 겁쟁이, 환관의 무기”라고 쓴 종이를 들고 있다. 샹트페테르부르크/AP 연합뉴스
한 러시아 시민이 20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가에서 열린 야당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를 지지하는 시위에서 “독은 여자, 겁쟁이, 환관의 무기”라고 쓴 종이를 들고 있다. 샹트페테르부르크/AP 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의 정적’으로 꼽혀온 러시아 야권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가 지난 20일 ‘독극물 중독’ 증세로 쓰러지면서, 과거 옛 소련과 러시아에서 발생한 비슷한 사건들이 주목받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최고 권력을 비판하거나 체제 유지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이 독극물을 통해 살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냉전 기간 동안 정보기관 케이지비(KGB)가 이런 방법을 자주 활용했다.

1959년 10월 우크라이나의 민족지도자로 독일에 망명해 살고 있던 스테판 반데라가 뮌헨 자택 앞에서 괴한이 뿌린 스프레이를 들이마신 뒤 곧바로 사망했다. 2년여 만인 1961년 11월 독일 당국은 케이지비 요원 보그단 스타친스키가 청산가리 스프레이로 반데라를 암살했고, 니키타 흐루쇼프 당시 소련 서기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1978년에는 불가리아 반체제 작가로 영국에 망명한 게오르기 마르코프가 우산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독극물 ’리친(리신)’ 총알에 맞고 사망했다. 기밀 해제된 문건 등을 보면, 사건의 배후는 당시 불가리아 정권과 옛 소련으로 추정됐다.

옛 소련 붕괴 뒤 1990년대 보리스 옐친 체제의 러시아에서는 이런 사건들이 거의 사라졌지만, 2000년 케이지비 요원 출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당선된 뒤 이런 식의 살해 사건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4년 체첸 사태를 파헤치며 푸틴 대통령을 비판했던 언론인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도 비행기에서 차를 마신 뒤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그는 당시에는 목숨을 건졌지만, 2년 뒤 괴한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2006년 11월에는 전 러시아 정보요원으로 푸틴을 비판하다 영국으로 망명했던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호텔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의 시신에서 방사성 독극물이 다량 발견됐고, 사건 발생 10년 만인 2016년 영국 당국은 러시아 연방보안국 요원들이 그를 독살했고, 푸틴 대통령이 관여됐을 수 있다고 결론냈다.

2018년 3월초에는 영국 솔즈베리의 쇼핑몰에서 러시아 출신 이중간첩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이 독극물 중독 증세로 쓰러졌다가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미국은 그해 8월 러시아가 신경작용제 ‘노비촉’을 사용해 스크리팔을 독살하려 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영국 언론 <가디언>은 “푸틴 대통령이 (독살 사건들에) 얼마나 관여했는지, 어떤 지휘 체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며 “하지만 러시아 안팎외 많은 희생자들은 크렘린이 이런 사건을 필요악으로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적었다.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AP 연합뉴스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AP 연합뉴스

한편, 독일과 프랑스가 나발니에게 망명처와 의료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아에프페>(AFP) 통신 등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각) 정상회담을 한 뒤 기자회견에서 나발니를 지원할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메르켈 총리는 “(나발니가) 원한다면 독일 병원 치료를 포함해 의료 관련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말했고, 마크롱 대통령도 “의료, 망명, 보호와 관련해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할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두 정상은 이번 사태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나발니가 갑자기 의식 불명에 빠진 이유를 신속히 밝혀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앞서 나발니는 이날 러시아 톰스크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던 항공기 안에서 이상 증세를 보였다. 해당 항공기는 긴급 착륙을 했고 나발니는 한 병원으로 응급 이송됐다.

나발니 쪽은 그가 독극물 중독 증세로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옮겨졌다고 전했다. 또 나발니가 아침에 공항에서 유일하게 차를 마셨다며, 차에 독성 물질이 섞인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나발니는 러시아 야권의 핵심 인사로 푸틴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지속적으로 비판해 수십 차례 투옥된 바 있다. 변호사 출신으로 야권 정치지도자가 된 그는 야권이 취약한 러시아에서 그나마 푸틴 대통령의 ‘대항마’로 꼽혀왔다. 지난 2017년 4월에도 모스크바 시내에서 한 포럼에 참석했다 나오다 괴한이 얼굴에 약물을 뿌리면서 눈 동공과 각막 손상을 입은 바 있다. 2018년 대선에서 푸틴에 도전하려 했으나 과거 지방정부 고문 시절 횡령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 때문에 후보 등록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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