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미국의 잘메이 칼리자드 협상 대표(왼쪽)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압둘 가니 바라다르 협상 대표가 카타르 도하에서 만나 18년에 걸친 아프간 전쟁의 종식을 위한 평화합의서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도하/로이터 연합뉴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 18년간의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미국이 2018년 9월부터 탈레반과 접촉해 평화 합의를 모색해온 지 1년5개월 만이다. 하지만 협상과 합의에서 배제된 아프간 정부의 반발 강도가 여전히 변수로 남아있어 평화로 가는 길이 순탄치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 ‘모든 외국군 철수’와 ‘서방 안보’ 맞바꿔
미국 쪽 잘메이 칼리자드 협상 대표와 탈레반의 압둘 가니 바라다르 협상 대표는 지난 29일(현지시각) 카타르 도하에서 만나 평화협정에 서명했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합의문은 전체 4개 장으로 짜였다. △탈레반은 어떤 조직이나 개인도 아프간 영토를 미국과 동맹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데 활용하지 못하도록 보장 △미국과 국제동맹군 등 모든 외국군이 아프간에서 향후 14개월 안에 전면 철수 △외국군 철수 일정 발표 뒤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와 내부 정치협상 개시 △아프간 내부 정치협상에서 항구적이고 포괄적인 정전 협상 등이 뼈대다. 탈레반의 합의 준수 여부는 미국이 평가하도록 했다.
미군은 합의 이행 1단계로 이날부터 135일 안에 아프간 주둔 병력을 현재 1만2000여명에서 8600명으로 줄이고, 5개 기지에서 모든 외국군이 철수할 예정이다. 또 상호 신뢰 구축을 위해 3월10일까지 국제동맹군과 아프간 정부군에 수감된 탈레반 포로 5000명과 탈레반에 붙잡힌 아프간 정부군 및 국제동맹군 포로 1000명을 교환하고, 미국은 탈레반 지도부에 대한 경제 제재를 오는 8월27일까지 해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미국은 특히 “아프간 내부 정치협상에 따라 새 정부가 구성된 뒤로도 탈레반과 긍정적 관계를 모색”하고 “아프간 재건을 위한 경제협력을 검토하며, 아프간 내정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명시해 눈길을 끈다. 미국은 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이번 합의의 승인을 요청할 것”이란 문구도 넣어 국제협약으로서의 실효성을 강조했다.
미국-탈레반의 아프간전쟁 종식 평화협정문 첫 장.
■ 탈레반은 환호, 아프간 정부는 불안
이번 합의는 미국이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구체적 일정 제시까지 약속했다는 점이 가장 도드라진다. 서방의 외세에 대한 ‘지하드(이슬람 성전)’를 명분 삼아 기득권을 강화해온 탈레반으로선 최대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재건해야 하는 아프간 정부는 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면서도 이번 합의의 이행을 실질적으로 떠맡게 됐다. 더욱이 ‘국내 정치협상’이란 조건이 달렸지만 외국군이 떠날 경우 탈레반의 무장 봉기 등 치안 불안감도 떨치기 힘들다.
양쪽 협상 대표가 서명식을 끝내고 악수하는 순간 탈레반 쪽에선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라는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이런 순간은 없었다”며 “우리는 매우 성공적인 협상을 했다. 모두가 전쟁에 지쳤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머지않은 미래에 탈레반 지도자들과 만나겠다”고 밝혔으나 구체적인 일시와 장소에 대해선 “살펴보고 있다”며 확답을 미뤘다.
탈레반의 바라다르 협상대표는 “모든 아프간 국민에게 평화를 위해 정직하게 노력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모든 외국군이 철수함에 따라 아프간인이 이슬람 율법(샤리아) 아래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인 탈레반이 향후 아프간 정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주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 대선 앞둔 트럼프의 ‘외교 치적’?
이번 합의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그간 외교적 성과가 없었던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행정부도 못한’ 치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지난 대선 후보시절부터 해외주둔 미군을 집에 데려오겠다며 ‘아프간 철군’을 내걸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국이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을 잡겠다며 시작한 아프간 전쟁으로 미군 사망자만 2440여명, 아프간 민간인은 3만8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이 쏟아부은 돈도 2조달러(약 2400조원)에 이른다.
그러나 이번 합의는 미국이 아프간 정부를 배제한 채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 탈레반과만 협상한 ‘반쪽 합의’라는 한계도 드러냈다. <미국이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탈레반으로 알려진 아프간 이슬람 에미리트와 미국의 아프간 평화 정착 합의>라는 합의문 제목 자체가 그 성격과 한계를 보여준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서명식에서 “아프간의 승리는 그들이 평화와 번영을 이룰 때만 가능하며, 미국의 승리는 미국과 동맹국 국민이 더는 아프간으로부터 테러 위협의 공포를 갖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9월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외교단지에서 차량 자살폭탄 공격이 발생해 미군 요원 등 12명이 숨지고 40여명이 다친 현장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주도 아프간 지원군 병력이 출동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카불/AP 연합뉴스
<워싱턴 포스트>는 1일 “탈레반과의 합의가 미군의 출구를 내겠지만 아프간을 위한 장기적 해결책은 아니다”고 짚었다. 이 신문은 미국 국방부의 전직 고위 관리를 인용해 “군과 정보기관의 일부 고위 당국자들은 ‘트럼프 정부가 탈레반과의 약속에 너무 많은 것을 담았다. 탈레반은 우리가 떠나기만 한다면 무엇에든 서명할 것’이라고 우려한다”고 전했다. 미 행정부의 또 다른 고위 관리도 <시엔엔>(CNN) 방송에 “탈레반이 영원한 악이진 않겠지만 이번 합의가 하룻밤에 장미꽃과 비둘기를 가져다주지도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 거대한 전환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아프간 대통령 “탈레반 석방 의무 없다”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에게 유리하게 비칠 수 있는 이런 합의문을 수용할지도 관건이다. 미국이 아프간에서 사실상 손을 떼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재선을 확정지은 아시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미국과 탈레반의 협정 서명 다음날인 1일 기자회견을 열어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 수감자 5000명을 석방한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다”며, 포로 석방을 거부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아프간 정부가 이번 합의의 당사자가 아닌 만큼 합의를 이행할 의무가 없다는 뜻이다.
가니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대선에서 50.64%를 득표해 1위를 차지하고도 부정선거 시비로 결과 발표가 미뤄져왔으나, 지난달 18일 아프간 선거관리위원회가 그의 당선을 최종 확정했다. 아프간 정부로서는 합법적으로 선출되지도 않은 채 국토의 상당 부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일반 국민에게 전근대적 ‘이슬람식 통치’를 행사하는 탈레반 조직원들을 대거 석방하는 게 엄청난 정치적 부담일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는 이번 합의를 반기는 분위기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은 29일 성명에서 “이번 합의는 중대한 진전으로 환영한다”며 “아프간 전역에서 지속적인 폭력 감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우디아라비아·파키스탄·카타르 등 이슬람권 국가들도 환영 성명을 냈다.
국제동맹군의 주축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이번 합의는 아프간 내부의 정치협상을 통한 포괄적 평화 합의로 가는 길을 닦았다”며 “탈레반이 평화의 기회를 품어 안기 바란다”고 밝혔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평화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며 “퇴보와 장애물에 대비해야 하지만 평화로 가능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평가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