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7일 총기 참사가 일어난 텍사스 엘패소 지역 방문에 나서자, 트럼프 대통령의 방문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엘패소 국제공항으로 가는 길 위에 서서 ‘인종차별주의자는 돌아가라”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엘패소/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7일 총기 참사로 들끓고 있는 오하이오주 데이턴과 텍사스주 엘패소 방문에 나섰다.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슬픔에 잠긴 지역사회를 위로하는 한편, 응급구급대원 등 참사 현장으로 달려온 이들에게 감사와 격려를 표하겠다’는 게 백악관이 방문 직전 밝힌 목적이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 도시를 ‘침공’말라”며 자신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대를 피해 ‘잠행’이나 다를 바 없는 행보를 보였다.
명색이 참사 지역 방문이었지만, 트럼프의 모습은 이날 종일 대중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출발과 도착 당시 공항에 짧게 모습을 드러낸 것을 제외하고, 트럼프는 이날 이렇다 할 공개 발언에 나서지 않았다. 참사가 일어난 현장엔 아예 가지도 않고 대신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인근 병원을 방문한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부상자들과의 만남 장면은 동행 취재 기자에게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병원 쪽에서 ‘사진찍기용 행사’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는 게 백악관 쪽 설명이었다. 하지만 백악관은 트럼프가 참사 생존자와 의료진, 경찰 등과 만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매끈하게 편집된 동영상과 함께 공개하며 “대통령이 병원에서 록스타 대접을 받았다”(스테파니 그리셤 대변인 트위터)고 밝혔다.
트럼프의 이런 행보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전임 대통령들이 총기 참사 때 직접 현장을 찾아 국민을 위로하는 메시지를 던지며 대국민 통합의 기회로 삼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를 두고 “전통과의 뚜렷한 단절”이라고 표현했다. ‘침공’ 운운하는 트럼프의 인종주의적 ‘분열’의 언어가 이번 총기 난사에 부채질을 했다는 비판과 함께 총기 규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고조되는 등 궁색해진 트럼프의 입장이 일정 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이날 데이턴과 엘패소 방문을 위해 백악관을 떠나기 전 ‘대통령의 인종주의적 언어가 이번 사태를 촉발했다는 지적이 있다’는 기자들의 말에 “오히려 내 말이 사람들을 단합하게 만들었다”며 “정쟁에서 벗어나 있겠다”고 말했다. 참사 추모·위로에 집중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런 장담도 오래가진 않았다. 그는 데이턴에서 엘패소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아이오와 유세에 대해 “너~~무 지루하다. 그의 연설을 보도한 변변찮은 방송사들이 시청률과 클릭 수에서 밀려 죽게 생겼다”고 비아냥 거리는 트위트를 날렸다. 바이든이 트럼프를 향해 ”말 그대로 대학살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에 반격하며, 정쟁을 재개한 셈이다. 그는 민주당 소속 셔로드 브라운 상원의원(오하이오)과 낸 웨일리 데이턴 시장에 대해 “병원 안에서 일어난 일을 완전히 왜곡하는 사기 기자회견을 했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정작 웨일리 시장 등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환대 받았다고 했을 뿐인데, 뭐가 왜곡됐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어리둥절해 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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