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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헤이세이 30년’의 한일관계…냉탕·온탕 오간 뒤 ‘구조적 불화’에 빠지다

등록 2019-04-29 14:52수정 2019-04-29 20:48

1990년대 고노 담화, 한-일 공동선언으로 화해 주춧돌 통해
2000년대 ‘한류’라는 화려한 우호의 꽃 피워
2010년대 들어 독도·위안부 등 ‘미해결 갈등’ 불거지고
‘중국의 부상’에 대한 한-일 간 전략적 불신으로 ‘구조적 불화’
한-일 우호의 단단한 기반이 됐던 ‘한-일 관계선언-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의 두 주인공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한겨레> 자료사진
한-일 우호의 단단한 기반이 됐던 ‘한-일 관계선언-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의 두 주인공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한겨레> 자료사진
헤이세이(1989~2018)기 30년 간의 한-일 관계를 한마디로 줄이면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격렬한 변화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한-일은 ‘한류’란 이름의 화해와 우호의 꽃을 피우기도 했지만, 결국 서로를 불신하는 ‘구조적 불화’에 빠졌다.

1989년 1월7일 히로히토 일왕의 사망으로 시작된 헤이세이기는 세계사적으로는 냉전 해체와 맞물렸다. 1980년대 3저 호황에 힘입어 고도 성장을 이뤄낸 한국은 90년 러시아, 92년 중국과 잇따라 수교하며 동아시아의 중견국으로 성장했다.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 실명 고백한 김학순 할머니. <한겨레> 자료자신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 실명 고백한 김학순 할머니. <한겨레> 자료자신
한-일 관계를 놓고 보면, 1987년 6월항쟁의 민주화 열풍을 타고 역대 군사정권들이 억눌러온 대일 요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를 상징하는 움직임이 1991년 8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 실명 공개한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외침이었다.

전쟁과 식민지배를 직접 경험한 일본의 ‘기성세대’는 한국 피해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군의 개입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힌 ‘무라야마 담화’(1995)가 나왔다. 이런 반성적 역사인식은 전후 일본 사회 심층에 잠복해 있던 우익을 자극했다. 아베 신조란 자민당의 젊은 정치가는 1990년대 초부터 두 역사적 담화에 맹렬히 반대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1995년 지난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담긴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2014년 2월 한국 국회를 방문해 위안부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1995년 지난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담긴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2014년 2월 한국 국회를 방문해 위안부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하지만 두 담화의 기반 위에서 한-일 관계는 안정적으로 발전했다. 그 직접적 결과물이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서명한 ‘한-일 관계선언-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이다. 이 선언을 계기로 양국 문화 교류가 시작돼 2000년대 일본에 ‘한류 열풍’이 불었다. 이런 흐름이 이어져 2018년 한 해 양국을 오간 이들은 1000만명이 넘는다.

그러나 한-일은 ‘상호 신뢰’에 이르진 못했다. 무엇보다 1965년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해결되지 못한 독도 문제 등 영토 문제, 위안부 등 역사 문제가 큰 장애물이 됐다.

2015년 12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정부간 합의인 12·28 합의를 발표하고 있는 윤병서 전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전 일본 외무상. <한겨레> 자료사진
2015년 12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정부간 합의인 12·28 합의를 발표하고 있는 윤병서 전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전 일본 외무상. <한겨레> 자료사진
이런 갈등 요인들은 2010년 이후 표면화된 ‘미국의 상대적 쇠퇴와 중국의 부상’이란 지정학적 변화에 의해 증폭됐다. 아베 정권과 박근혜 정부가 잇따라 탄생하던 2012년 말~2013년 초 한-일은 서로 다른 대중 접근법을 택했다. 일본은 미-일 동맹을 강화해 중국에 맞서려 했지만, 한국은 ‘대중 접근’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양국 갈등은 2015년 12·28 합의를 통해 역사 문제를 매듭짓고, 한-미-일 3각 동맹 강화를 주장한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물이 한반도의 사드 배치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이었다.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 때 한 합의를 되돌리는 과정에서 일본의 강한 반발을 만났다. 일본은 ‘한국 무시’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 현재 한-일은 상호 신뢰를 찾을 수 없는 ‘구조적 불화’의 시기에 진입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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