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원 외교위원장인 밥 코커 의원(가운데)이 4일 지나 헤스펠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에 대한 비공개 브리핑을 들은 뒤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의 최고 몸통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더욱 뚜렷이 무함마드 빈살만(33) 왕세자 쪽으로 향하고 있다.
지나 해스펠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4일 상원에 출석해 카슈끄지 피살과 관련한 조사 결과를 비공개 브리핑으로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의원들은 카슈끄지의 죽음에 사우디 왕세자가 연루돼 있다는 더욱 강한 확신을 갖게 됐다고 <에이피>(AP) 등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상원 외교위원장인 밥 코커 의원(공화당)은 “왕세자가 (살해를) 지시하고 모니터했다. 그가 재판정에 선다면 배심원들은 30분 안에 그에게 유죄 평결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정보국장의 의회 증언을 앞장서 요구해온 린지 그레이엄 의원(군사위·공화당)은 “사우디 왕세자가 카슈끄지의 죽음에 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제로”라며 “(그에게는) ‘스모킹 건’이 아니라 ‘스모킹 톱’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터키 정부가 “카슈끄지는 터키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서 사우디 왕실 소속 암살팀에게 살해된 뒤 주검은 톱으로 해체됐다”고 발표한 것에 빗대어, 빈살만 왕세자가 카슈끄지 살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음을 내비친 것. 의원들은 비공개 조건에 따라 해스펠 국장의 설명을 그대로 전하지는 못했다. ‘스모킹 건’은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으로,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생전 모습. 미국 워싱턴에 꾸려진 단체인 ‘자말 카슈끄지를 위한 정의(Justice for Jamal Khashoggi)의 페이스북 갈무리.
지금까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은 미국과 사우디의 전략적 관계를 강조하며 “카슈끄지 살해에 사우디 왕세자가 관련됐다는 직접적인 보고는 없다”거나 “그가 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며 얼버무려 왔다. 미국의 중동 정책에서 핵심 동맹이자 지렛대인 사우디의 실세와의 관계가 곤란해지는 상황이 달갑지 않아서다. 그러나 이날 해스펠 국장의 보고와 상원의원들의 발언은 그동안 백악관이 빈살만 왕세자를 두둔해온 입장과 정면으로 상충된다.
미국 상원이 사실상 카슈끄지 살해 사건의 진짜 책임자는 사우디 왕세자라는 결론을 내림에 따라, 앞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이 사건을 어떻게 마무리할지에 관심이 쏠린다. 사우디 왕실에 대한 제재 여부가 그 핵심이다. 앞서 지난주 상원은 사우디가 예멘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중단하는 결의안의 상정을 압도적 표차로 가결했다. 이 결의안은 다음주에 정식 안건으로 다뤄질 예정인데, 상원 의원들은 결의안의 구체적 내용을 놓고 협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정부로선 지난 5월 이란과의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란 제재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중동 지역의 우군이 절실하다. 의회를 회유하거나 적당한 선에서 타협안을 마련할 가능성이 점쳐지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일부 의원들은 해스펠 국장의 비공개 브리핑에 자신들이 초대받지 못한 것을 문제 삼고 나섰다. 사우디에 비판적 태도를 보여온 랜드 폴 상원의원(외교위·공화당)은 “일부 의원들을 (브리핑에서) 배제한 것이야말로 ‘딥 스테이트’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트럼프 정부가 몇몇 의원들에게 따로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예멘 전쟁 결의안’ 표결 때 입장을 바꾸도록 시도하고 있다는 의혹도 내놨다. ‘딥 스테이트’는 국가 권력의 핵심부 및 관료조직, 정보기관 등의 내밀한 곳에서 공적인 의사 결정과 무관하게 중요 정책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인물이나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11일 상원에서 결의안이 통과된다 하더라도 하원에서도 같은 결의안이 채택될 지는 미지수다. 현재 하원의장을 맡고 있는 공화당의 폴 라이언 의원은 지난달 29일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예멘 결의안 채택은 우리가 갈 길이 아니다”며 부정적 의견을 밝히고, 대신 ‘마그니츠키 인권책임법’에 의한 규제를 제안한 바 있다. 마그니츠키법은 2012년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에 제정된 인권 보호법으로, 국제사회의 인권 규범을 침해한 외국인들의 미국 방문 불허 또는 미국내 자산을 동결할 수 있다. 2009년 러시아 회계사 세르게이 마그니츠키가 정부 관리들의 부패를 폭로했다가 교도소에 수감된 뒤 의문사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