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만드는 이웃들’(NBN) 프로그램에 따라 주민들의 결정에 의해 로체스터 6구역 펨브로크 거리의 주택 담
벼락에 벽화가 그려졌다.
미국 뉴욕주에서 뉴욕과 버펄로에 이어 세번째로 큰 도시인 로체스터(Rochester)는 ‘가장 부유한’이란 뜻의 ‘리치스터’(Richester)로 불리기도 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로체스터에는 세계적 첨단기업이었던 코닥과 제록스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의 ‘실리콘밸리’가 부럽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시작되면서 기울기 시작한 코닥은 결국 2013년 파산했고, 로체스터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지난 8일(현지시각) 로체스터를 찾았을 때 여전히 일부 주택가에는 주인 없이 방치된 흉물스러운 ‘좀비 하우스’가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창문은 떨어져 나갔고, 페인트가 벗겨진 집 담벼락은 금세라도 쓰러질 듯하다. 기존 산업이 무너져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이 집을 내버려둔 채 도시를 떠난 것이다.
로체스터의 황금기에 주차 전쟁을 치렀을 시내 5~6층짜리 큰 주차탑들도 빈자리가 많다. 코닥 공장 주변 주차장은 콘크리트 바닥을 허옇게 드러낸 채 자동차 몇 대만 드문드문 있을 뿐이다. 한때 6만명에 이르던 코닥 직원은 이제 2000명 아래로 떨어졌다.
이처럼 로체스터의 겉모습이 예전 같진 않지만, 로체스터는 지금 부활을 향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2000년 21만9000명이던 로체스터의 인구는 2015년 현재 20만9800여명으로 1만명밖에 줄지 않았다.
사우스 거리와 알렉산더 거리가 만나는 지점에는 마을 공원(오른쪽)이 세워져 있다.
자동차산업 중심지로 함께 ‘러스트 벨트’(rust belt) 지역에 속한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가 같은 기간 94만5000명에서 67만7000여명으로 인구가 3분의 1가량 줄어든 것과 견줘보면, 로체스터의 끈끈한 생명력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코닥의 몰락에도 로체스터의 실업률(4.9%)은 빠른 속도로 회복돼 오히려 미국 전체 실업률(5.0%)보다 낮다. <포브스>는 지난해 6월 로체스터를 ‘일자리 찾기 좋은 도시’의 맨 앞에 놓기도 했다.
디트로이트,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등 한때 영화를 누렸던 5대호와 대서양 연안의 ‘러스트 벨트’ 지역 도시들은 자동차·철강 산업이 붕괴되면서 인구가 크게 줄어 도시 자체가 황폐화됐다. 그런데 로체스터는 무엇이 다른가?
‘마을 만드는 이웃들’이 뛰자 ‘좀비 도시’가 되살아났다
시민들이 도시 살리기 사업 주도
주택가 벽화 등 환경미화로 시작
“병원 10층 말고 2층으로 짓자”
“강변에 호텔 신축 주민과 협의”
떠나는 도시가 돌아오는 도시로
자동차산업 중심지로 함께 ‘러스트 벨트’(rust belt) 지역에 속한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가 같은 기간 94만5000명에서 67만7000여명으로 인구가 3분의 1가량 줄어든 것과 견줘보면, 로체스터의 끈끈한 생명력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코닥의 몰락에도 로체스터의 실업률(4.9%)은 빠른 속도로 회복돼 오히려 미국 전체 실업률(5.0%)보다 낮다. <포브스>는 지난해 6월 로체스터를 ‘일자리 찾기 좋은 도시’의 맨 앞에 놓기도 했다.
디트로이트,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등 한때 영화를 누렸던 5대호와 대서양 연안의 ‘러스트 벨트’ 지역 도시들은 자동차·철강 산업이 붕괴되면서 인구가 크게 줄어 도시 자체가 황폐화됐다. 그런데 로체스터는 무엇이 다른가?
여성과 흑인 인권운동에 앞장서온 진보적 역사, 코닥이 100여년 동안 꽃피워온 문화와 예술, 우수한 대학들, 아름다운 풍광의 온타리오 호수 등이 로체스터 사람들을 그대로 붙잡아둔 주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런 시의 자산을 바탕으로 로체스터를 지켜낸 힘은 ‘정치’였다. 20여년간 코닥에서 일하다 코닥이 파산한 뒤에는 벤처기업인 ‘그래피닉스 디벨로프먼트’를 세워 로체스터에 그대로 살고 있는 윌리엄 매케나는 “로체스터는 우리 도시를 보호하자는 정신이 아주 강하다. 그것은 정치의 힘일 수도 있고 문화의 힘일 수도 있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로체스터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시민단체 대표로, 흑인으론 처음 1994년 시장이 된 윌리엄 존슨의 역할이 컸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시민 자치’와 ‘시민 우선주의’를 내걸고 이른바 ‘마을을 만드는 이웃들’(Neighbors Building Neighborhood·엔비엔)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도입하는 행정개혁을 실시했다. 시는 로체스터를 특성에 따라 10개 구역으로 나눈 뒤, 구역별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역 목표와 행동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행하도록 했다. 시는 옆에서 이를 지원하고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겠다는 것이다. 시청 직원들이 구역별 회의에 참석하지만, 회의를 이끄는 것도 아니고 시의 요구사항을 주문하지도 않는다. 로체스터 남동쪽을 관할하는 ‘엔비엔 서비스센터’의 낸시 존스프라이스 센터장은 “시청이나 시청 직원은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키는 촉진자 역할만 수행할 뿐”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기업·학교·시민단체 등 자원과 예산, 인력을 지원해줄 수 있는 곳을 ‘파트너’로 삼는다. 시민들은 파트너를 구하는 과정에서 예산 제약을 깨닫고 사업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하게 된다. 현재 6구역 대표를 맡고 있는 주디 리 헤이는 “구역마다 운영방식이 다르다. 우리 구역 안에 6개의 마을이 있는데, 마을 대표 6명이 모여 매월 한차례 ‘팀 회의’를 통해 6구역 전체 사안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처음 주민들의 관심은 쓰레기 줍기 등 환경 미화, 거리 안전, 소규모 공원 조성, 불법 마약판매 단속 같은 생활 문제에 집중됐다. 시내 ‘사우스 거리’와 ‘알렉산더 거리’가 만나는 곳에 세운 아주 작은 마을 공원이나 주택 담벼락에 벽화를 그린 펨브로크 거리를 가보면 소박한 느낌마저 들지만, 이런 작은 노력들이 동네에 온기를 불어넣어 도시 황폐화를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민들은 점점 건물과 토지 용도 계획을 결정하는 좀더 높은 차원의 도시개발 이슈를 관할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6구역에 속한 ‘하일랜드 병원’이 10층 규모의 신축 건물을 지으려 했으나, 구역 내 주민들이 병원 쪽과 협의해 2층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병원 영업도 고려하고, 지나친 혼잡도 피하려는 절충안이었다. 제너시 강변에 호텔을 세우는 재개발 사업도 주민들과의 상의를 거쳐 이뤄졌다.
처음에는 시청 직원들의 반발도 상당했고, 주민들의 참여도 미적지근했다. ‘시민들이 프로젝트를 만들어낼 수 있겠느냐’, ‘시청 직원들이 하는 것보다 비효율적이다’ 등이 주된 반론들이었다. 엔비엔 자원봉사활동을 하다 시청 직원으로 채용된 티머시 하워드는 “시청의 업무문화를 바꾸는 일이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며 “하지만 엔비엔이 정착되면서 부동산 개발업자가 시청에 허가를 요구하면 시청 직원들의 첫마디는 ‘구역 주민들과 얘기해봤냐’는 거였다”고 말했다. 초기부터 엔비엔 활동에 참여해온 시청의 경제전문가 매슈 매카시는 “시민들이 테이블에 앉아 시의 일을 직접 결정한다는 것, 주민들이 시의 일을 위해 조직을 만들고, 그 성과를 직접 경험하는 것, 이런 일들이 시민들의 참여를 점점 높여갔다”고 말했다. 시에 대한 시민들의 애착과 주인의식이 더욱 커지면서 시민들은 로체스터를 떠나 새로운 삶터를 찾기보단 로체스터를 더 나은 곳으로 바꿔나가는 데 애를 쓰게 된 것이다. 엔비엔 사업을 구상하고 추진한 존슨 전 로체스터 시장은 “엔비엔이 만병통치약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민들은 강해졌지만, 여전히 일자리는 부족하다”고 아쉬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일자리 문제에 마법은 없다”면서도 “그래도 미래를 낙관하고 싶다”고 말했다.
로체스터/ 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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