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일 이탈리아 남부 코릴리아노 항구에 도착한 ‘유령선’ 이자딘호에서 난민들이 밖을 내다보고 있다. 약 360명의 난민들이 탄 이 배는 선원들 없이 바다를 떠돌다 구조되었다
“난민 문제가 그리스 경제 위기보다 유럽연합에 더 큰 도전이다.”(8월16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지금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난민 위기에 직면해 있다.”(8월26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최근 열흘 사이만도 세계 정상급 지도자들에게서 잇따라 긴급한 경고가 터져나왔습니다. 썰렁한 패러디를 하자면,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난민 위기가 전 유럽을 배회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난민 위기가 ‘유령’이 아니라 심각한 현실이라는 겁니다. 도대체 지금 유럽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국제부에서 세상만사를 기웃거리는 조일준입니다. 주로 유럽과 과학 분야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자가 쓰는 기사는 독자에게 최대한 친절해야 한다고 믿고 외쳐왔는데(주로 술자리에서), 정작 ‘친절한 기자들’에 이름을 올리는 건 처음이라 머쓱합니다.
유럽이 밀려드는 난민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지중해에서, 터키와 발칸 반도에서, 하루에도 수백 수천명의 난민이 무작정 옵니다. 대다수는 시리아와 이라크, 아프리카 일부 국가 등 분쟁 지역 출신입니다. 나고 자란 땅에서 모든 걸 잃고 마지막 삶의 희망을 붙잡는 심정일 겁니다. 여기에다, 동유럽의 일부 저소득 국가들에서 부유한 서유럽 지역으로 일자리를 찾아 오는 이주자들도 꽤 많습니다.
유럽연합의 최신 집계를 보면, 올해 상반기에만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온 난민이 무려 25만명에 이릅니다. 그 과정에서 최소 2000여명이 조난사고 등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난민 유령선, 주검 실은 난민선, 절망과 공포에 젖은 눈동자들…. 삶과 죽음이 물살에 뒤엉켜 소용돌이칩니다. 그럼에도 지중해 난민 유입은 특히 최근 2~3년 새 기하급수로 늘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이들 지역과 가까운 그리스와 이탈리아(지중해 연안),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발칸 반도) 같은 나라들은 난민 위기의 최전방이 되고 있습니다.
분쟁·재해 난민과 달리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려는 이주자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난민이 아닙니다. 유럽 최대의 난민 수용국인 독일이 “발칸 반도 국가들에서 오는 불법 이주자들은 99% 돌려보낼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오늘날 국제사회가 난민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규범력 있는 기준은 1951년 채택된 ‘난민의 지위에 관한 국제협약’(유엔난민조약)입니다. 이 협약이 정한 ‘난민의 지위’ 요건은 꽤 긴 문장입니다. 요약해 보면 “인종, 종교, 국적, 신분,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거나 그럴 우려 때문에 국적국을 떠났으며, 국적국의 보호와 귀환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줄였어도 숨가쁘시지요? 아무튼,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난민 물결은 유럽연합 회원국 사이에도 큰 갈등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왜 특정 국가만 난민 쓰나미를 맞아야 하느냐는 불만, 역내 국가들이 난민 수용을 분담하고 하루빨리 실효성 있는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는 위기감 때문입니다.
급기야 독일이 총대를 멨습니다. 5년째 내전 중인 시리아 난민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겁니다. 지난 24일 독일 정부는 모든 시리아 난민들은 어느 나라를 거쳐 유럽에 들어왔는지에 상관없이 독일에 머물 수 있다고 전격 발표했습니다. 현재 자국 내 시리아 난민 추방령을 거두고, 애초 유럽의 어느 국가에 첫발을 들여놨는지도 묻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런 결정은 1990년 제정된 이후 유럽연합 난민 정책의 근간이 되어온 더블린 조약을 무력화하는 획기적인 전환입니다. 더블린 조약은 난민들이 유럽 땅에 첫발을 디딘 회원국이 그들을 책임진다는 게 뼈대입니다. 그런데 난민들의 첫 도착국이 아님에도 올해 상반기에만 4만4417명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인 독일이 앞장서 두 팔을 활짝 벌렸습니다. 지금까지 더블린 조약을 내세워 시리아 난민을 거부해온 다른 유럽 국가들에 상당한 압박일 수밖에요. 실은 그게 메르켈 총리가 기대한 효과일 겁니다.
유럽연합은 더는 ‘강 건너 불’이 아니게 된 난민 문제 공동대응에 총력을 기울일 작정입니다. 그러려면 회원국 간 협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국제사회는 냉정한 힘의 논리로 움직이며, 어느 나라든 국익이 최우선입니다. 그러나 인류 보편의 가치와 인도주의를 위해 지혜를 나누고 힘을 보태온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유럽연합이 난민 위기를 다뤄가는 방식은 단지 그 지역뿐 아니라 지구공동체 차원에서도 중요한 이정표가 될 전망입니다.
조일준 국제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