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노동에 내몰리는 ‘유러피언 드림’
주영 라트비아 대사관 실태조사
주영 라트비아 대사관 실태조사
이주노동자들의 노예노동은 신흥개발국이나 졸부 국가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러피언드림’을 꿈꾸며 유럽 선진국에 들어온 이주자들도 끔찍한 노동 환경에 내몰리기 일쑤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 13일 “영국의 비양심적인 고용주들에게 착취당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에도니스 바르바크스는 16년 전 영국에 온 라트비아 출신 이주자다. 그는 영국 남동부 도시 보스턴의 한 농장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직접 보고 겪은 노동착취 사례들을 정리했다. 영국 주재 라트비아 대사관이 자국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실태 조사를 한 이 보고서는 영국 정부에도 전달됐다. 이에 따르면 일부 악질 고용주들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주고, 턱없이 비싼 주거비를 받으며, 여권을 빼앗아 보관하는 방식으로 고삐를 틀어쥐기도 한다.
우선 직업소개소들은 하나의 일자리에 이주노동자들을 3명이나 고용하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보험료 비용을 절감한다. 농장 일꾼이나 공장 노동자들은 출퇴근할 때 직업소개소가 제공하는 차량을 타도록 강요받는데, 5~8파운드의 요금을 내고 출근하고 나서야 그날 일감이 없다는 통보를 받기 일쑤다. 작업 중 다쳐서 치료비를 요구하면 곧장 해고다. 저임금에 항의하면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르고, 다시는 그 지역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고용주들의 성폭력을 호소하는 여성 노동자들도 상당수다. 식품 가공공장에서 일하던 한 여성 외국인 노동자는 사장이 칼을 들이대며 위협했다고 폭로했다.
케빈 하일랜드 영국 노예노동방지감독관은 “이런 ‘현대판 노예노동’은 영국 안에서 값싼 제품들에 대한 수요가 늘고, 본국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이주민들이 영국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는 유혹이 맞물리면서 생겨난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농업, 어업, 서비스업, 건축 부문 등에서 발견되는 노동착취 사례들은 매우 충격적”이라며 “21세기 영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영국 사회가 깨닫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정부는 최근 불법 이주자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기업들에 대한 강력한 단속에 들어갔다. 주로 아프리카와 중동 출신 이주자들이 영국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영국 정부는 특히 영국과 유럽 대륙을 잇는 도버해협 지하터널의 프랑스 쪽 진출입구인 칼레에서 밀입국을 시도하는 이주자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유럽연합 회원국 출신으로 정당한 노동권을 부여받은 이주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현실은 감독의 사각지대에 놓였다. 언어 소통의 장벽과 노동 관련법에 대한 부족한 지식도 이주노동자들의 부당한 노동 현실에 한몫을 한다.
그럼에도 경제위기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상당수 유로존 국가들에선 갈수록 더 많은 노동자들이 더 나은 일자리와 보수를 찾아 영국으로 건너오고 있다. 영국 통계청이 지난 4~6월에 조사한 자료를 보면, 영국에서 일하고 있는 유럽연합 회원국 출신 이주노동자의 수가 사상 처음으로 200만명을 넘어섰다. 이 중 거의 절반인 97만3000여명이 폴란드·라트비아·리투아니아·슬로베니아 등 동유럽 8개국 출신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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