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리사 키스킨, 리리싼
공산당 창설자 리리싼의 부인 101살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자인 리리싼(이립삼·1896~1967)과 국경을 넘은 ‘세기의 사랑’으로 유명한 러시아 출신의 부인 리사(리사 키스킨·왼쪽)가 12일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졌다. 향년 101.
중화권 매체 <보쉰>과 <아에프페>(AFP) 통신 등 외신들은 가족의 발표를 인용해 그의 부고를 전했다. 러시아 귀족 가문 출신인 리사는 1930년대 모스크바에 머물던 리리싼과 만나, 21살의 대학생이던 36년 결혼했다. 중국공산당 창설자 중 한명인 리리싼은 도시 폭동으로 중국혁명을 이뤄야 한다는 ‘리리싼 노선’을 주장하며 당을 이끌었으나 난창봉기 등이 실패하자 실각해 30년 소련으로 망명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도 스탈린에게 소환돼 자아비판을 한 데 이어 38년 비밀정보기관에 끌려가는 등 고난을 겪었다. 하지만 리사는 리리싼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리사는 생전 중국 매체 <광명망> 인터뷰에서 “친구 집에서 ‘리밍’이라는 가명을 쓰는 리리싼을 처음 만났을 때 과묵한 중국 청년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그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고 회고했다. “주변의 많은 친구들은 그의 과오를 말하며 그와 사귀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나에게 한명의 귀여운 청년일 뿐이었다”는 리사는 “우리 러시아 여성에게 사랑과 이성은 아무 관계도 없으며, 만약 둘 사이의 사랑에 이성이 개입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45년 리리싼이 귀국한 이듬해 리사도 중국으로 따라왔다. 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기념식에는 부부가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행복은 길지 않았다. 리리싼은 초대 노동부장(노동부 장관)으로 활약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인 67년 반혁명분자로 몰려 혹독한 비판을 받다 실종됐고 이후 자살한 것으로 발표됐다.
남편과 함께 거리에 끌려나가 고초를 겪기도 했던 리사는 8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75년 석방됐다. 80년 덩샤오핑 체제에서 남편과 함께 명예회복을 한 리사는 생전에 남편의 자살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베이징외국어대 등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친 그는 중국에서 ‘러시아어문학 연구의 대모’로도 불린다. 2013년 프랑스 정부는 “20세기 고난의 시대에 인간성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말살하려던 세력들의 시도에 수차례 저항했다”며 당시 99살의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신화망>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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