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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난 악마였지, 너넨 천사였고

등록 2014-11-28 18:40수정 2014-11-29 10:55

10년 전인 2004년 12월26일 아체 쓰나미에서 살아남았던 두 아이들. 왼쪽이 바우까고 오른쪽이 자흐라띠다. 민사뚜록응아 임시학교에서 찍었다. 정문태
10년 전인 2004년 12월26일 아체 쓰나미에서 살아남았던 두 아이들. 왼쪽이 바우까고 오른쪽이 자흐라띠다. 민사뚜록응아 임시학교에서 찍었다. 정문태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35) 아체 쓰나미 10년
▶ 정문태 1990년부터 타이를 베이스 삼아 일해온 국제분쟁 전문기자. 23년간 아프가니스탄·이라크·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뛰며 압둘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훈센 캄보디아 총리 등 최고위급 정치인 50여명을 인터뷰했다. 저서로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2004년), <현장은 역사다>(2010년)가 있다. 격주로 국제뉴스의 이면을 한겨레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두 아이를 찾아 나섰다.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도 모른다. 주소도 전화번호도 없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저 손에 든 10년 전 사진 한 장이 다다. 친구들은 모두 낄낄댔다. 바쁜 취재를 걸어놓고 괜한 짓 말라는 뜻이었다. 망설이긴 했지만 못 찾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예감을 믿는 편이니까.

지난 23일 10년 만에 다시 만난 자흐라띠.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르고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옛날 사진 한 장만 갖고 훌쩍 성장해버린 아이를 찾아냈다. 정문태
지난 23일 10년 만에 다시 만난 자흐라띠.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르고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옛날 사진 한 장만 갖고 훌쩍 성장해버린 아이를 찾아냈다. 정문태
“민사뚜록응아(록응아1초등학교)로!”

11월23일, 운전기사를 닦달했다. 세월에 닳아 비록 그 아이들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초등학교만은 또렷이 기억났다. 10년 전 두 아이는 민사뚜록응아에 다녔고, 나는 구조대를 쫓아 폐허가 된 록응아를 취재했다. 그날 록응아에는 그나마 찢긴 모스크 하나를 빼곤 서 있는 게 없었다. 민사뚜록응아도 시멘트 바닥만 남아 있었다. 나는 밟히는 주검들을 무심히 휙 돌아보며 왜 살 썩는 냄새가 내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지를 생각했을 뿐 더 이상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을 따진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내가 나를 볼 수는 없었지만, 틀림없이 그날 내 얼굴은 악마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렇게 나는 사람도 자연도 모조리 깨져버린 땅을 기웃거리다가 민사뚜록응아 임시 판자 교실에서 빛을 보았다. 천사였다. 온 세상이 아파하며 울부짖는 그 잔인한 절망 속에서 환하게 웃을 수 있다는 건 틀림없는 천사였다. 가슴이 터질 듯했다. 나는 그 아이 둘을 한참 동안 쳐다보면서 다시 사람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그 땅을 떠나면서 다짐했다. ‘내게 희망을 보여준 이 천사들을 잊지 않겠다고.’

10년 전 12월26일 이른바 안다만해 쓰나미로 17만여명이 숨지고 50만 웃도는 이들이 집을 잃었던 아체 이야기다. 그동안 40여곳에 이르는 전쟁터를 취재하면서 온갖 파괴를 보았고 수십만 웃도는 주검들을 보았지만 내 기억에 박힌 가장 잔인한 현장은 아체였다. 그러나 도시로 되돌아온 나는 머잖아 스스로를 배신했다. 내 마음속에서 그 천사들은 서서히 멀어져갔다. 그 뒤로도 나는 록응아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한 반다아체를 몇 번 찾았지만 결국 민사뚜록응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여섯 해가 지닐 즈음엔 아예 기억 속에서마저 가물거렸다. 그렇게 두 아이를 찾아 나서기까지는 10년이 흘렀다.

케이팝 입에 올리며 “이민호가 최고다”

반다아체에서 자동차로 20여분 떨어진 람끄루엣 마을에서 2층짜리 예쁜 민록응아란 학교를 찾아냈다. 숨이 가빠졌다. 전선에 오르기 전 늘 했던 대로 학교 맞은편 구멍가게에 앉아 커피를 시켜놓고 숨을 골랐다. 이방인 등장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전직 교사 자마루딘은 아이들 사진을 보자마자 이름과 집까지 또렷이 찍어냈다. 구멍가게 주인은 10년 전 사진을 찍던 한국 기자로 나를 기억해내기까지 했다. 끝났다. 예감이 적중했다. 통역을 맡은 누르딘 하산(아에프페 아체 기자)은 “기적! 기적!”을 연발했다. 지난 10년 동안 생존자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린 사정을 놓고 보면 기적일지도 모른다. 자마루딘을 쫓아 천사 1을 찾아갔다. 주민 3천여명 가운데 2천명 웃도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아무것도 남은 게 없던 람끄루엣 마을엔 새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주민 수도 제법 늘어 이제 18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87호 문을 두드리는 수만큼 가슴도 함께 뛰었다. 두 언니들에 이어 세번째로 튀어나온 아이가 사진을 받아들고는 3초쯤 뒤에 활짝 핀 미소로 사진 속의 아이가 자신임을 확인했다. “제가 맞아요!” 올해 열여섯살 먹은 자흐라띠였다. 자흐라띠는 놀란 듯 수줍어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미소는 10년 전 바로 그 천사의 것과 한 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너무 고마웠다. 예쁘게 자라준 자흐라띠의 미소를 보면서 속울음이 터져 몇 번이나 먼 데를 쳐다봤다. 말문이 열린 자흐라띠는 여느 소녀들과 다를 바 없이 케이팝(K-Pop)을 입에 올렸고 “배우 이민호가 최고다”며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를 외쳐댔다. 허당 기질이 엿보이는 즐거운 천사 자흐라띠는 기술고등학교 2학년으로 패션디자인을 배우고 있다며 머잖아 멋진 디자이너가 될 것이라고 한다. 시멘트회사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딸 넷이 함께 살아가는 자흐라띠 집안은 한눈에 행복이 넘쳐 보였다. 이들은 람끄루엣 마을에서 드물게 단 한명 희생자도 없이 온 가족이 살아남은 행운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런 자흐라띠한테서는 다행히도 쓰나미의 어두움을 볼 수 없었다. “지진이 날 때만 쓰나미 공포가 몰려오지만 악몽 같은 건 없어요. 잠도 잘 자고….”

쓰나미로 인해 주검들이 나뒹구는 폐허가 됐던 민사뚜록응아 임시학교의 10년 전 모습.   정문태
쓰나미로 인해 주검들이 나뒹구는 폐허가 됐던 민사뚜록응아 임시학교의 10년 전 모습. 정문태
자흐라띠를 보고 나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자마루딘이 같은 동네에서 천사 2의 아버지를 찾아냈다. 옷 수선과 구멍가게를 해온 아버지는 그 아이가 열여섯살 먹은 바우까 뿌뜨리 레스타리고 를로 마을의 알휘타얀 이슬람기숙학교에 있다고 알려줬다. 단숨에 달려갔다. 쓰나미 뒤에 쿠웨이트와 카타르 도움을 받아 지은 이 기숙학교는 2007년 개교 때만 해도 쓰나미와 분쟁 피해를 입은 아이들이 많았지만 하나둘씩 졸업해나가면서 이제 보통 기숙학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참 내성적인 아이다. 1학년 땐 말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공부도 좀 처지는 편이더니 2학년이 되면서 친구도 생기고 공부도 잘한다.” 교무실에서 바우까의 1학년 때 담임선생 무르시이다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초등학생만한 아이가 들어왔다. 바우까였다. 아주 예의 바른 바우까는 10초쯤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그냥 웃기만 했다. 짝꿍이었던 자흐라띠가 바우까를 이름과 집까지 또렷이 기억했던 것과 달리 바우까는 자흐라띠를 못 알아봤다. “쓰나미로 엄마를 잃은 뒤 외할머니 집에 가서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여기서 먹고 자며 공부했어요.” 바우까는 “독립심을 기르려고 스스로 기숙학교를 택했다”며 지금 대학에 다니는 언니 셋도 모두 기숙학교 출신이라고 했다. 말투도 자세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는 아이 바우까는 “쓰나미 때 우리 마을에 의사가 없어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며 “의대 가서 의사가 되어 마을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바우까는 아직 소녀였다. “새엄마도 잘해주지만, 진짜 우리 엄마와 다르잖아요.” 또랑또랑하던 바우까 눈이 잠깐 흐려졌다. “주말에 어머니들이 와서 친구들을 데려가는 걸 보면…, 엄마가 너무 보고 싶고….”

지난 23일 10년 만에 다시 만난 바우까.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르고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옛날 사진 한 장만 갖고 훌쩍 성장해버린 아이를 찾아냈다. 정문태
지난 23일 10년 만에 다시 만난 바우까.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르고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옛날 사진 한 장만 갖고 훌쩍 성장해버린 아이를 찾아냈다. 정문태
밟히는 주검을 무심히 돌아보며
살 썩는 냄새를 생각했을 뿐
10년 전 그날 내 얼굴은 악마였다
잔인한 절망 속에서 날 사람으로
되돌려준 천사들을 다시 만났다

운 좋게 온 가족 생존한 자흐라띠
엄마 잃고 외할머니와 산 바우까
“악몽 많이 꿨지만 이제 괜찮아요”
10년 전의 미소를 다시 지었다
너무 미안했다, 부끄러웠다

그 아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했던가

영어선생 라흐맛 시아끄리는 “1학년 때까지 말이 없었던 바우까는 쓰나미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 같다”고 귀띔했다. 자흐라띠에 비해 아주 다른 환경과 성격을 지닌 바우까를 보면서 가슴이 아렸다.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를 뜰 때쯤 바우까는 “4~5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봤던 주검들이 자꾸 떠오르고…, 악몽을 많이 꿨는데 이젠 괜찮다”며 환하게 웃었다. 10년 전 그 천사의 미소가 되살아났다. 바우까는 떠나는 내 손을 꼭 잡고는 자기 머리에 한참 동안 갖다 댔다. 너무 미안했다. 부끄러웠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자흐라띠와 바우까는 민사뚜록응아의 400명 아이들 가운데 살아남은 100여명, 그 가운데 둘이었다. 나도 세상도 그 아이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도 국제사회도 그저 1년쯤 반짝했을 뿐이다. 지난 10년 동안 세상은 그이들한테 몇 푼 던지는 걸로 모든 걸 때웠다. 이제 그 쓰나미 10주년이 다가온다고 난리들이다. 아체에는 온갖 행사를 알리는 간판들이 나붙었고 외신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두 아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발길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내게 희망을 보여주었던 그 아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보여주었던가? 내게 그 아이들도 10주년 행사용이 아니었을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그 예쁜 아이들에게 이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해마다 생일만큼은 챙겨줘야겠다. 수첩에 잘 적어두고.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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