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록 경북대 교수(왼쪽부터), 조세영 동서대 교수, 오태규 한겨레 논설위원, 이원덕 국민대 교수가 15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법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일본전문가 좌담/ 군위안부 해법은?
오태규 ‘한겨레’ 논설위원실장
“1965년 한-일 협정 이후 한-일 관계 최악 그 중심에 위안부 문제가 있다”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그나마 보였던 진전조차 아베정부가 허물어뜨리려는 상황…유보시키는건 출구 되기 어렵다”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
“위안부문제 성의도 없는데 안보·경제 협력해야 한다면 일본에게만 편리한 논리”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정상회담은 하는 게 맞다…위안부 문제 때문에 못한다면 20년간 안해야 할지도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2년 12월 각각 집권에 성공한 이후 21개월 동안 양자회담 형식으로 두 정상이 한번도 만나지 않는 등, 한-일 관계의 냉각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아베 정부의 과거사 물타기와 박근혜 정부의 대일 강경론이 충돌하면서 단기간에 경색국면이 풀릴 가능성도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는 한-일 관계의 질적인 진전을 위해선 반드시 해결해야 할 ‘입구’로 굳어졌다.
<한겨레>는 오태규 논설위원실장의 사회로 15일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가나다순) 등 국내 최고의 일본 전문가 3명과 함께 위안부 문제의 구체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자리를 가졌다. 열띤 논쟁을 통해 전문가들은 외교적 해법의 필요성, 미봉책보다는 근본적 해결책 모색 등에 대해 일정한 공감대를 이뤘냈다.
오태규(이하 오) 현재의 한일관계에 대한 인식을 보면, 첫째, 한-일 관계가 한일협정 이후 최악이다, 두번째는 이런 한-일 관계를 그대로 놔둬선 안 된다, 세번째는 이 ‘최악’ 상태의 한-일 관계 중심에 위안부 문제가 있다는 정도는 공유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해법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 같다.
이원덕(이하 이) 대략 4가지 시나리오가 있다고 본다. 첫번째는 법적 해결이다. 일본에서 위안부 관련 특별법을 제정해서 배상과 사죄 문제를 처리하는 입법해결 방식이다. 피해자들이나 지원단체, 우리 국민까지 모두 만족하겠지만, 2000년대 참의원 일부 진보파가 만든 법안이 국회에 상정조차 안되고 있는 등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해보인다. 두번째는 재단이나 법인을 만드는 방식인데, 일본이 시도한 아시아여성기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번째는 한-일 청구권협정 3조에 따라 중재위원회를 여는 건데,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중재위 구성과 중재안의 수용 면에서 전망이 확실치 않다. 네번째는 외교적 타결이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 방식과 합치하고, 2012년 일본 노다 정부와 이명박 정부도 시도했다. 현실적으론 어느쪽도 간단치 않다.
2012년 ‘노다-이명박’ 교섭 주목
조세영(이하 조) 크게 보아 원칙에 맞는 걸 시도할 거냐, 현실적으로 가능한 쪽을 추구할 거냐의 둘로 나눌 수도 있다. 원칙은 당장 피해자들과 관련단체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법적 책임과 보상 또는 배상이다. 일본의 현실과 한-일의 의견이 다른 상황을 고려한 현실적인 판단에선 여러 대안이 나왔다. 일본이 ‘기금’이란 시도를 했고, 한국도 일본에 법적 책임은 묻되 금전적 배상은 요구하지 않는 식의 시도를 했다. 위안부 문제는 20년 이상 오면서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러나 모두 벽에 부딪혔다. 의견이 다른 국가와 국가는 외교적 타결을 통해 중간선을 도출해야 하는데, 위안부 문제는 20년 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현실적 대안마저 쉽게 받아들여지기 힘들게 됐다. 그렇다고 원칙론이 쉽게 가능하지도 않다는 데 딜레마가 있다.
김창록(이하 김) 법적 해결이 특별법 제정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법적 책임은 한국에서 먼저 요구한 게 아니다. 일본 쪽에서 1965년에는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위안부 문제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법적으로는 끝났다고 고집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고 우기면서 책임을 애매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국 쪽에서 명확하게 법적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게 된 것이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핵심이다. 일본이 명확하게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 위안부 문제는 갑자기 현안으로 등장한 문제가 아니라 오랜 기간 역사적 사실들이 쌓여온 구조적 문제다.
오 이 교수가 말한 ‘외교적 해결책’은 구체적으로 염두에 둔 것이 있나?
이 2012년 노다 정부와 엠비 정부 간에 있었던 교섭의 경위에 주목해야 한다. 두 차례에 걸쳐서 외교적 타결이 시도됐다. 첫번째는 그해 봄 흔히 ‘사사에 제안’으로 알려진 안이다. 총리의 공식 사죄, 정부 예산으로 피해자들에 대한 금전 지급, 주한일본대사의 사죄 등 3가지였다. 그리고 가을에 시도된 안이 또 있었다. 여기엔 정상회담의 코뮈니케(공동성명) 형식으로 일본의 최고지도자가 공식 책임과 사죄를 공식으로 표명하는 것, ‘금전’이라고 했던 봄의 제안에서 한발 나아가 ‘사죄금’ 명목으로 지급할 것, ‘도의적 책임’이란 표현이 아니라 ‘나라의 책임’을 인정한다고 쓸 것, 그리고 역사공동위원회를 통해 진상규명과 미래 준비를 할 것 등의 내용이 담겼다. 한국의 요구와 일본의 현실적 입장이 빠듯하게 다가선 선에서 타협된 내용이었다고 평가한다.
오 가을에 나왔다는 제안은 전문가들 사이엔 많이 알려졌을지 몰라도, 대중적으로는 처음 알려지는 것 같다. 그 정도 합의안이라면, 최근 일본 동향을 볼 때 타당하거나 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조 ‘국가 책임’ 인정이 굉장히 중요하다. 만약 일본이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면, 타결될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과연 당시에 일본 내 일부 인사들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정부의 실무적인 검토를 거쳐서 나온 결론인지는 회의적이다. ‘사사에 제안’은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고, 다라서 우리는 그것으로 국내를 설득할 수 없다고 보고 거부했던 것이다. 과연 일본 정부의 입장이 바뀌었을까? 저는 노다 정부 당시에도 아니었다고 본다. 또 최근 고노담화 검증이나 <아사히신문> 오보 인정에 대한 아베 정부 및 일본 우파의 반격 등 일본 국내 상황을 볼 때, ‘국가 책임 인정’이란 부분은 달성 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하기가 더욱 어렵다.
김 국가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사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라면, 당연히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입법이 가장 명확한 방법이긴 하지만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내각의 최고 책임자인 총리가 담화를 발표하는 것으로 그걸 대체할 수도 있다.
이 아베 정부에선 이 제안까지 일본이 양보하기 어려울 거라고 보지만, 2012년 가을의 노다 정부였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깊이 관여했던 인물은, 일본 쪽은 사민당 출신으로 노다 정부의 외교안보수석 같은 역할을 했던 사이토 쓰요시 내각 관방부장관이었고, 한국 쪽은 이동관 언론문화협력대사였다. 한국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이 배제된 상태에서 정치적 타결을 시도한 것이다. 문안을 보면, “나라의 책임을 통감한다(國の責任を痛感する)”고 했고, ‘사죄금’이란 표현도 들어갔다. 당시 외교부는 아니지만 청와대는 오케이 했다. 그리고 노다 총리가 이 안을 놓고 고심을 했고, 교섭을 했던 사람들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아세안+3’ 정상회담 계기에 ‘원포인트’로 한-일 정상회담을 열어 노다 총리가 이 4가지가 담긴 공동선언문을 읽는 시나리오도 준비했다. 그러다 노다 정권이 다른 사유로 국회를 해산하면서 무산됐다. 일본 민주당 정부에서 가장 진보적 인물에 의해 추동돼 빠듯한 선까지 갔던 것이었기 때문에, 아베 정부에선 가능성이 상당히 멀어졌다고 본다.
따질건 따지면서 분리대응 이야기
김 아베 정부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노다 정부에서도 과연 합의 내용이라는 것을 일본 내에서 관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특히 일본 관료들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조 설사 타결이 됐다 하더라도, 그와 관련해 일본 국회에서 질문이 나오면 일본 정부는 변함없이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위안부 문제도 해결되었고, 따라서 법적 책임은 없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일본이 겉다르고 속다르다고 할 것이고, 여론의 반발 때문에 일본관의 합의가 다시 뒤집혔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단순히 아베 정권이라 어렵지만 노다 정부 땐 가능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한국에선 ‘사사에안’ 정도면 가능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지만, 일본에선 ‘사사에안’도 노다 총리가 오케이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도 당시 ‘국가 책임’을 인정한 것이 아니기에 거부했던 안이다.
오 최근 정세를 보면 일본이 고노담화, 무라야마담화 시절을 되살리는 것조차도 버거워보이고, 그런 가운데 정치적 타결을 기대하는 게 과연 옳은 건지도 의문이 든다. 옛날 걸 살리자고만 얘기하기엔, 지나간 버스에 손흔드는 건 아닌가 생각도 든다.
이 현실적인 해법이라면, 차라리 유보론을 주장하고 싶다. 국제사회로부터의 지지도 있으므로 위안부 이슈는 당장 해결하려 하지말고, 장기적 과제로 원칙적 입장에서 추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피해자와 지원 단체들도 마치 자신들이 원리주의적 해결 방식을 주장해서 한일관계 파탄과 그에 따른 불이익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데 대해 부담을 느낀다. 그러나 국민들이 유보론에 동의해줄지는 회의적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선행적 조치가 없으면 대일관계 개선이 있을 수 없다는 ‘마술’을 걸어놨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꼼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됐다.
조 분리대응에 대찬성이다. 하지만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성의도 없고 구체적인 진전도 없는데, 안보·경제는 분리해서 협력해야 한다고 하면, 일본에게만 편리한 논리라는 비판이 나온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는 제대로 따져야 한다. 좀 부담스럽고 약간 풍파가 있더라도, 따질 건 따지면서 분리대응을 이야기해야 설득이 된다.
김 지금의 교착상태를 만들어 낸 가장 큰 원인은 아베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매우 퇴행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3년 고노 담화, 1995년 무라야마 담화로 그나마 보였던 진전조차 허물어뜨리려고 하는 상황에서, 이걸 단순히 유보시키는 건 설득력있는 ‘출구’가 되기 어렵다.
이 유보론적 입장에서 분리대응을 한다면 정상회담을 열어서 다음 3가지 정도는 확인해놓을 필요가 있다. 우선, 아베 총리 본인의 입으로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계승 입장을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 아베 지지층은 우익과 현실주의자로 구성됐는데, 우익들은 반대하더라도 현실주의자들은 국제사회나 외교적 입지를 고려해 아베를 압박할 거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위안부·강제징용 문제 해결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어 장기적으로 논의하게 해야 한다. 양국이 만날 때마다 과거사 문제를 논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조처다. 세번째는 미래를 얘기할 공간을 열어놔야 한다.
김 아베 총리가 단지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계승을 확인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 이렇게까지 흔들어놓고 1995년 이전으로는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확인하는 것만으로 사태가 해결되기 어렵다.
오 2011년 헌재가 결정한대로 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른 중재 절차를 진행한다면 해법이 될 수 있을까?
김 헌재 결정의 의미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중재라는 절차는 여러 현실적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중재는 상대가 응해야 중재위를 구성해 시작할 수 있게 돼있다. 둘째, 헌재 결정은 중재위의 중재 사안에 대해, 청구권 협정에 관한 양국의 해석차이로 발생한 분쟁에 대한 해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 뿐이라면 어떤 식으로 중재 결정이 나와도,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 된다. 셋째, 중재는 시한이 없다.
조 그렇다면 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느냐고 되묻고 싶어진다. 헌재 결정은 정부의 선택지를 굉장히 좁힌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청구권협정 3조에 의한 행동(중재)을 하지 않는 게 ‘부작위’라는 논리로 제기한 소송에서 이겨 그런 결정이 나왔으면, 일단 그 결정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마저 해법이 아니라고 하면, 지붕 위에 올려놓고 흔드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중재로 해결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과정은 필요하다고 본다.
과거사 해결없인 결국 벽 부딪쳐
김 제가 정부를 지붕 위에 올려놓을 힘은 없다.(웃음) 2006년 헌법소원이 제기된 배경을 되짚어보면,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 결정에서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고 밝혔다. 또 외교적 대응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후에 진전이 없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한-일 외교 당국 접촉에서 위안부 문제를 언급도 하지 않았다. 청구권협정 3조에는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그게 잘 안 되면 중재로 해결하라고 돼있다. 한국 정부가 아무런 외교적 노력도 하지 않으니, 피해자들로서는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자는 심정으로 헌법소원을 낸 것이다. 이걸 헌재 결정대로 중재로 가야 한다고만 하면, 청구한 쪽의 진의를 법적으로 너무 좁히는 것이다. 핵심은 해결해달라는 거다. 중재로 가지 말라는 게 아니다. 그건 외교 당국이 판단할 부분이다.
이 청구권협정 3조는 중재위를 3인으로 한다고 했다. 제3국의 판사 3명으로 이뤄진 중재위가 구성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청구권협정 8개 항목에 의한 배상 대상에 위안부 문제가 들어있지 않다고 하면, 아까 얘기대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일본은 다소 압박을 느껴 아시아여성기금 검토 등 ‘플러스 알파’ 조처를 했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청구권협정으로 해결이 됐다고 나오면, 우리는 완전히 ‘멘붕’이 된다. 그렇게 나올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다. 중재위로 간다 해도, 잘 해야 다시 출발점에 서게 된다는 한계가 있다.
오 제3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은 일관적이지 않았다는 얘기를 한다. 어떻게 봐야 할까?
김 위안부 문제 뿐 아니라, 65년 조약 해석 전반에 관해 한국 정부 입장은 많이 흔들렸다. 대통령뿐 아니라 외교부도 그랬다. 한국과 일본에서 진행된 과거청산 관련 소송들에 관여하다 보니 한국 정부의 준비서면도 보게 되는데 그 내용이 소송마다 다르다. 이런 현실이 지금 같은 문제를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됐다.
이 우리 정부도 일관성이 없었지만, 일본도 흔들렸다.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 들어 새로 제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1950~60년대엔 전시에 발생한 여성의 인권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는 문제의식조차 없었다. 1990년대 이후 냉전이 붕괴되고 동아시아의 민주화, 또 인권의식의 고양이라는 사회 흐름과 더불어 다시 이슈화된 것이다.
김 법학자 입장에서 보면, 일본 정부는 1965년 시점부터 법적 책임에 관해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히 논리적으로 접근했다. 일본 정부의 일관성이 흔들렸던 건, 2000년 한국, 중국, 대만, 필리핀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미국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을 때다. 일본 정부가 그전까지 일본 국내 법정에서 주장했던 시효나 국가무책임 법리 등의 논리가 미국 법정에선 통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에 대한 해석을 바꿨다. 그러나 논리적 연결을 완전히 버리진 않았다. 한국 정부도 1990년대 중반 이후엔 일관성을 보이지만, 정부 차원에서 한-일 조약에 대해 얼마나 체계적인 논리를 갖고 있는지를 좀 더 챙겨야 한다.
조 외교사안의 일관성 문제에 대한 논의가 우리에겐 굉장히 부족하다. 거꾸로 일본은 그런 일관성에 너무 집착한다. 일본도 꼭 좋다고 할 순 없지만, 우리도 따질 걸 안 따지는 면이 있다. 일본 우파 뿐 아니라 최근에는 일본의 중도 내지 진보도 한국 정부의 일관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일본과 위안부 문제를 논쟁할 때, 우리 내부에서 지금까지 경위를 수미일관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대내외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청구권협정 3조에 의한 중재 절차를 검토했던 것도 정부로서 일관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금전적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다. 국내 여론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5개월 뒤 고노 담화가 발표되자 우리 정부는 양자 차원의 외교현안으로는 일단락되었다고 밝혔다. 2005년 8월 위안부 문제 등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고 발표했으면서도 그 뒤에 외교적 교섭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정부가 단지 무성의했다기보다는 1993년 이후 일관성 유지에 대한 고뇌도 있었다고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이 김영삼 정부가 금전적으로 해결하지 않겠다고 했던 원칙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도덕적 우위에 서서 다루면서 법적 책임은 일본에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피해자 조처는 우리 세금으로 처리하는 건, 일본을 압도하는 좋은 방법이다. 일본 내에선 한국이 거듭 물질 요구를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한국은 1965년 이래 1원도 추가로 요구한 적이 없다. 이게 대일외교에서 아주 중요한 원칙이다. 일본이 만약 입법을 통해 법적으로 해결을 한다 해도, 보상문제에 대한 국제 스탠더드를 고려해 줄 수 있는 돈의 한도는 살아있는 분들에게 최대 5천만원씩, 대략 모두 25억원이다. 우리가 25억원의 문제를 위해 이렇게까지 싸우는 거라면 허무하기 짝이 없다.
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금전적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한 건, 2005년과 같은 체계적인 검토 없이 1965년에 끝났다고 막연히 전제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금전배상은 액수의 문제가 아니고, 일본 정부가 그 돈을 왜 한국인 피해자에게 줘야 하느냐의 문제다. 아시아여성기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건, 돈의 액수가 아니라 ‘위로금’이라는 명목이 명확한 책임을 인정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1965년에 무슨 일이 있었고, 그 뒤 한-일 과거청산과 관련해서 어떤 문제가 남아있고, 전체적으로 어떤 단계에 와있는가 하는, 보다 큰 틀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
오 오는 11월 APEC에서 중-일 정상회담설이 나오면서 한-일 정상회담이 먼저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도 있다. 위안부 문제와 정상회담,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까?
이 정상회담은 하는 게 맞다. 위안부 문제 때문에 정상회담을 못한다는 식의 논리를 강조한다면, 적어도 20년간 정상회담을 안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당장 만나자는 게 아니라, 충분히 만날 수 있는 외교적 여유공간을 만들어놓자는 것이다.
조 11월에 중-일은 정상회담을 할 것이다. 과거 고이즈미 총리가 재임중 매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자, 중국은 5년간이나 양국 정상의 상호 방문을 보이콧했다. 따라서 정식 중-일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았지만, 제3국이나 중국에서 열린 국제 행사에선 제한적으로 정상회담에 응했다. 마찬가지로 11월 APEC은 중국이 주최국이므로 일본만 정상회담에서 제외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일이 하니 한-일도 해야 한다는 식보다는, 우선 눈앞의 숙제부터 해나가는 게 좋다고 본다. 외교채널을 활성화하고, 서울이나 도쿄에서 정식 외교장관 회담도 열어야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상회담을 모색하되, 11월의 시점 때문에 무리해서는 안 된다. 섣부른 타협은 지난 20년의 경위 때문에 국내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울 것이다. 좀 단호하게 길게 가져갈 생각도 갖고, 다른 문제들과 분리해서 현실적으로 일본과 협력도 하는 기조가 좋다고 본다.
김 아베 정부 이후 과거사 문제가 한-일 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커졌다. 이 문제의 해결 없이 아무리 다른 문제에서 진전을 보려고 해도 결국 벽에 부딪힐 것이다. 한일 양국 정부가 내년 수교 50년을 맞아 과거청산 문제 전반에 대해 명확한 방향을 선언하지 않으면 계속 꼬리를 물고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정리 김외현, 사진 박종식 기자 oscar@hani.co.kr
(왼쪽부터)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태규 ‘한겨레’ 논설위원실장,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
좌담 참석자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위안부 헌법소원 등 각종 과거사 관련 소송에 참여하고 있으며, 1900년대 초와 1965년의 한일조약과 한일 과거사 청산 과정의 법적 쟁점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국제학부)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도쿄대에 유학해 ‘한일회담 외교문서 분석’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일 관계사 뿐 아니라 후기 산업사회 일본이 직면한 문제들에도 관심을 보여왔다.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는 외교부 동북아국장을 지낸 30년 경력의 직업외교관 출신으로, 외교관 시절 주일본 대사관 서기관, 공사참사관 등을 거친 대표적인 ‘일본통’이다.
위안부 문제 관련 주요 사건 및 용어
한-일 청구권협정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국면에서 6월22일 서명된 협정으로, 일본이 한국에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를 제공하면서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이 된 것”이라고 선언했다.
김영삼 대통령 지시 1993년 3월13일 김영삼 대통령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관련해, 일본에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예산으로 피해자들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고노 담화 고노 요헤이 일본 내각관방장관이 1993년 8월4일 1년8개월 간의 조사 결과라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당사자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는 등 정부 차원의 위안부 동원과 강제성을 인정한 담화를 발표했다.
아시아여성기금 1995년 7월 일본 총리부와 외무성이 공동 관리하는 재단법인으로 설립됐다. 2007년 3월까지 한국·대만·필리핀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일본 국민으로부터 모금한 ‘보상금’을 총리의 편지와 함께 전달했다.
민관공동위원회 2005년 8월26일 정부는 이해찬 국무총리 주재로 한-일 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과 관련해 민관공동위원회를 열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같이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 사할린동포 및 원폭 피해자 문제 등은 1965년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위안부 문제 헌법소원 2011년 8월30일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해 한-일 간 분쟁이 있음에도 정부가 구체적인 해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해결하기 위한 행위를 하지 않은 ‘부작위’로 피해자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므로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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