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보도에서 언론이 독립성을 지니고 군대를 감시하겠다면 기자의 호칭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1982년 11월 캄보디아 분쟁 때 크메르루주 병사들을 취재하는 외신기자의 모습. 나오키 마부치 제공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26) 전쟁과 언론
(26) 전쟁과 언론
해마다 이맘때면 나라 안팎 언론들은 전쟁을 단골 메뉴로 뽑아든다. 올해도 6월 한 달 동안 언론사들마다 숱한 전쟁을 끌고 다녔다. 현대사를 흔들어 놓았던 전쟁들의 굴대가 될 만한 날들이 6월에 몰린 까닭이다. 꼭 100년 전인 28일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시발점이 되었던 이른바 사라예보사건이 터진 날이고, 73년 전 22일은 320만 독일군이 러시아를 전면 공격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동부전선으로 확전된 날이고, 70년 전 6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더 잘 알려진 연합군의 오퍼레이션 오버로드(Operation Overload)가 시작된 날이다. 5일은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 사이의 6일 전쟁(1967년)이 터진 날이고, 11일은 코소보전쟁(1998년)이라 불러온 나토연합군의 유고 침략전쟁이 끝난 날이고, 14일은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전쟁(1982년)이 끝난 날이다. 여기다 한국전쟁(1950년)이 터진 25일에다 6월5일 전쟁(1997년)이라 불러온 콩고공화국 내전을 비롯해 일일이 다 적을 수도 없을 정도다. 하기야 역사를 따져보면 365일 가운데 전쟁 없었던 날이 단 하루도 없겠지만 아무튼 현대사에서 6월은 좀 별난 달이 아닌가 싶다.
전선에 오르는 순간 기자는
감시의 눈길로 군대를 봐야 한다
국가·민족·종교·정파는 물론
때로는 언론사마저 배신할 수 있다
한데 ‘군대를 따르는 기자’라고?
국제사회는 종군위안부들을
‘일본군대 성노예’로 규정했다
그럼 종군기자란 건
‘보도노예’라는 뜻이다
이게 훈장처럼 여길 꼬리표인가 1949년 국방부가 발급한 ‘종군기자 수료증’ 외신이든 한국 언론이든 그 6월 전쟁 기사들을 훑어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 철 지난 전쟁들을 놓고 여전히 누가 탱크를 깨부쉈다거나 누가 고지를 탈환했다는 따위 무용담을 들먹이며 호전적 애국심을 강요하는 꼴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현대적 모습을 갖춘 전쟁보도가 180살이나 먹었는데 아직껏 언론들 정신연령은 사춘기에도 못 미친 게 아닌가 싶다. 현대적 개념의 언론과 전쟁보도란 게 대체 뭔가? 국가의 이름으로 정부가 저지르는 가장 극단적인 정치행위인 전쟁을 시민의 이름으로 감시하라는 위임을 받은 게 언론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그 전쟁보도에서 마땅히 반전과 평화의 인류사적 가치를 다뤄야 정상이다. 국가와 정부마저 구분하지 못하는 언론들이 퍼뜨리는 호전적 애국주의가 그래서 더 눈꼴사나운 건지도 모르겠다. 시민의 눈으로 볼 때 이 세상에 위대하거나 정당한 전쟁이란 건 결코 없었다. 21세기 시민의식조차 따라잡지 못한 채 변함없이 전근대적 군사주의 담론에 빠져 있는 언론들 습성이 애처롭게 보이는 까닭이다. 6월판 전쟁 기사들에서 우리 언론이 아주 즐겨 쓴 용어가 하나 있다. 종군기자다. 이게 바로 현대 시민사회와 교통하기 힘든 호전적 군사주의 역사관을 지닌 우리 언론사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말이다. 여기엔 보수니 진보가 따로 없다. 신문도 방송도 마찬가지다. 우리 언론사나 기자들이 종군기자란 말을 무슨 훈장처럼 여기는 게 아닌가 싶다. 어쩌다 분쟁지로 누가 취재만 갔다 하면 어김없이 ‘종군기자 아무개’, 심지어 ‘종군프로듀서 아무개’란 이름을 달고 나오는 걸 보면. 그러니 리비아 시위를 취재하면서 교전 현장 한 번 보지 못한 신문기자들도 저마다 종군기자였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을 따라다니며 탈레반을 ‘적’이라고 부르던 사진가도 종군기자였고, 이라크의 바그다드 호텔에 앉아 전선 냄새 한 번 맡아본 적 없는 방송기자도 다 종군기자였다. 왜들 그렇게 종군기자란 타이틀에 환상을 지녔을까? 종군기자란 게 뭔지 그 뿌리를 캐보자. 먼저 사전적 의미부터 훑어보자. 한자에서 따온 종군기자(從軍記者)란 걸 풀어보면 말 그대로 ‘군대를 따르는 기자’다. 이 종(從)자는 ‘따른다’거나 ‘쫓는다’는 겉뜻 말고도 ‘복종한다’거나 ‘거역하지 않는다’는 심각한 속뜻을 지녔다. 그러니 이 종군(從軍)이란 말을 쓰는 한 독립성을 생명처럼 여겨야 할 기자가 군대에 복속당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기록으로 볼 때 우리가 이 종군기자란 말을 처음 썼던 건 1949년 국방부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사 기자 20여명을 뽑아 태릉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시킨 뒤 발급했던 ‘종군기자 수료증’이 아닌가 싶다. 이어 한국전쟁 때인 1951년 피난지 대구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기자들이 헌병사령부 소속 종군기자로 전선을 취재한 기록이 있다. 바로 그 시절 군에 소속되어 승전보만을 전했던 그 전령사들이 ‘군대를 따르는 기자’였으니 진짜 종군기자다. 가까이는 2003년 미국의 제2차 이라크 침공 때 미군이 세계 각국 언론사에서 뽑은 기자들을 훈련시킨 뒤 현장으로 데려가서 보여주고 싶은 ‘아름다운 전쟁’만 보여준 이른바 임베드 저널리즘(embedded journalism)에 따라다녔던 이들을 종군기자라고 부를 만하다. 그러나 군대 감시와 비판 기능을 강조하는 현대적 언론관을 놓고 보면 군과 언론은 필연적으로 적대관계여야 정상이다. 그러니 군대가 수행하는 그 전쟁을 취재하는 이들을 종군기자라 부르는 건 기본 개념에서부터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가 겉만 따져본 종군기자다. 한국언론이 그 말 쓰는 건 반역 아닌가 이제 세상을 둘러보며 종군기자란 말의 속살을 파보자. 다른 언어권에서는 이 종군기자를 어떻게들 부를까? 일본은 말 할 것도 없이 우리가 베꼈으니 똑같은 한자를 써서 주군기샤(じゅらぐんきしゃ)라 부른다. 중국은 종(從)자처럼 따른다는 뜻을 지닌 수(隨)자를 써서 쑤이쥔지저(隨軍記者)라 불러왔다. 그러나 같은 아시아권인 인도네시아에서는 와르타완 프랑(Wartawan Perang), 타이에서는 푸스카오송크람() 그리고 버마에서는 싯타딘다욱()처럼 다들 ‘전쟁기자’고 한다. 영어로 워 코러스폰던트(war correspondent), 독일어로 크릭스레포르(kriegsreporter), 프랑스어로 코레스퐁당 드 게르(correspondant de guerre), 스페인어로 코레스폰살 데 게라(corresponsal de guerra)처럼 유럽어권에서도 모두 ‘전쟁기자’로 불러왔다. 이렇게 한국, 일본, 중국을 빼면 모든 언어권에서 전쟁 취재하는 기자를 군대와 한통속으로 묶어 ‘군대를 따르는 기자’로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건 언어·문화적 차이가 아니다. 20명 넘는 아시아·아프리카·유럽 출신 외신판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군대를 따르는 기자’라는 말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종군기자란 말은 19세기 말 일본 군대의 침략전쟁과 함께 자라온 일본 언론에서부터 비롯된 군국주의 용어고 따라서 이건 역사관의 차이다. 그 좋은 본보기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라는 당치도 않는 용어가 또 있다. 일본 군국주의 군대가 조직적으로 저지른 성폭력 피해자들을 두고 ‘군대를 따라다니며 성을 파는 여성’이란 뜻을 지닌 종군위안부로 불러온 나라는 일본과 한국뿐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침략전쟁에 기자들을 동원해 호전 나팔수 노릇을 시키면서 갖다 붙인 말이 종군기자다. 그래서 종군위안부와 종군기자란 건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를 지닌 용어다. 국제사회가 종군위안부를 ‘일본군대의 성노예’로 규정해서 그 피해자들을 불러왔다. 그렇다면 종군기자란 건 ‘보도노예’란 뜻이다. 이래도 종군기자란 꼬리표를 훈장처럼 여기며 감동해야 옳겠는가? 일본 언론이 오늘까지 그 두 용어를 고집하든 말든 그건 그 동네 역사관이다. 다만 군국주의 침략사관을 거부해야 마땅할 한국 언론이 그 두 용어를 그대로 베껴 써왔다는 건 반역이다. 말끝마다 친일을 나무라고 일제 잔재 청산을 외치면서 아직도 일본 군국주의 용어를 가장 많이 쓰는 곳이 언론판이고 기자들이기도 하다. 그 상징이 바로 종군기자란 용어다. 내 경험을 털어놓자면, 나는 20년 넘게 전쟁을 취재하면서 내가 군대를 따라다니는 놈이라고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더욱이 군대에 복종한다거나 굴복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 스스로 종군기자라고 여겨본 적도 없고 종군기자라고 불러본 적은 더욱 없다. 전쟁을 취재하는 기자란 건 시민사회로부터 전쟁의 본질을 캐고 군대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들이다. 따라서 전선에 오른 기자들이 복종할 의무를 지닌 대상은 오직 시민뿐이다. 그래서 기자란 전선에 오르는 순간부터 자신이 속한 국가·민족·종교·인종·정파 같은 건 말할 나위도 없고 자신을 돈 들여 파견한 언론사마저 배반하고 시민 편에 서야 옳다고 믿어왔다. 그러니 군국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종군기자란 말에 강한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군대와 언론의 종속관계를 뜻하는 이 종군기자란 말이 전선을 뛰는 기자들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리는 아주 불쾌한 용어로 들렸다. 진짜 전선을 뛰는 기자들은 자신들이 군언동침에 들지 않는 걸 직업적 명예로 여겨왔다. 그 명예는 자신들을 전선으로 파견한 시민에 대한 예의였다. 군언동침에서 깨어나기 위하여 전쟁보도에서 언론이 독립성을 지니고 군대를 감시하겠다면 기자를 부르는 이름부터 바로잡아야 옳지 않겠는가? 돌아보면 우리 언론에서 고민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1990년대 중·후반 <한겨레21>이 처음으로 머리를 싸맸다. 그 무렵 내 의지와 상관없이 기사에 ‘종군기자 정문태’란 말이 붙어 나갔던 적이 있다. 심한 거부감을 느낀 내게 당시 편집장이 내놓은 대안이 ‘국제분쟁전문기자’였다. 그게 지금까지 우리 언론을 통틀어 종군기자란 말을 대신해보겠다는 유일한 실험이다. 그로부터 몇몇 매체들이 국제분쟁전문기자니 분쟁전문기자 같은 말을 쓰기 시작했다. 근데 사실은 그 국제분쟁전문기자란 말도 너무 거창할 뿐 아니라 전문성이란 게 아주 주관적인 개념이고 보면 썩 어울린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나는 2004년 책을 내면서 종군기자 대신 ‘전선기자’란 말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기자’란 말보다는 좀 더 겸손한 느낌이 드는데다, 무엇보다 전쟁을 일으킨 주범들이 도사린 정치판과 군인들이 치고받는 전쟁터라는 두 전선을 모두 취재영역으로 삼아야 하는 내 현실을 좀 더 폭넓게 담아낼 만한 말이라고 여겼던 까닭이다. ‘정치가 빠진 전쟁 취재는 자위행위다’고 믿어온 내게 전쟁기자라는 말은 너무 전쟁터만을 강조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어쨌든 사회적 공감을 얻을 때까지는 국제분쟁전문기자든 전쟁기자든 전선기자든 뭐가 돼도 좋다. 다만 종군기자란 말은 이쯤에서 버리자는 결심을 독자들과 함께 나눠보고 싶다. 종군기자가 살아 있는 한, 기자들이 군대로부터 영원히 독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군기자가 살아 있는 한, 언론이 군언동침으로부터 영원히 깨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군기자가 살아 있는 한, 전쟁 보도는 파멸적 무장철학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군기자가 살아 있는 한, 시민들이 전쟁의 환상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종군기자를 떠나보내고 전쟁을 일으키는 정부와 그 군대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멋진 이름을 기자들에게 달아줄 때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기자들한테 군대를 따라다니지 말고 시민을 대신해 전쟁을 감시하라고 당당히 요구했으면 좋겠다.
감시의 눈길로 군대를 봐야 한다
국가·민족·종교·정파는 물론
때로는 언론사마저 배신할 수 있다
한데 ‘군대를 따르는 기자’라고?
국제사회는 종군위안부들을
‘일본군대 성노예’로 규정했다
그럼 종군기자란 건
‘보도노예’라는 뜻이다
이게 훈장처럼 여길 꼬리표인가 1949년 국방부가 발급한 ‘종군기자 수료증’ 외신이든 한국 언론이든 그 6월 전쟁 기사들을 훑어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 철 지난 전쟁들을 놓고 여전히 누가 탱크를 깨부쉈다거나 누가 고지를 탈환했다는 따위 무용담을 들먹이며 호전적 애국심을 강요하는 꼴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현대적 모습을 갖춘 전쟁보도가 180살이나 먹었는데 아직껏 언론들 정신연령은 사춘기에도 못 미친 게 아닌가 싶다. 현대적 개념의 언론과 전쟁보도란 게 대체 뭔가? 국가의 이름으로 정부가 저지르는 가장 극단적인 정치행위인 전쟁을 시민의 이름으로 감시하라는 위임을 받은 게 언론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그 전쟁보도에서 마땅히 반전과 평화의 인류사적 가치를 다뤄야 정상이다. 국가와 정부마저 구분하지 못하는 언론들이 퍼뜨리는 호전적 애국주의가 그래서 더 눈꼴사나운 건지도 모르겠다. 시민의 눈으로 볼 때 이 세상에 위대하거나 정당한 전쟁이란 건 결코 없었다. 21세기 시민의식조차 따라잡지 못한 채 변함없이 전근대적 군사주의 담론에 빠져 있는 언론들 습성이 애처롭게 보이는 까닭이다. 6월판 전쟁 기사들에서 우리 언론이 아주 즐겨 쓴 용어가 하나 있다. 종군기자다. 이게 바로 현대 시민사회와 교통하기 힘든 호전적 군사주의 역사관을 지닌 우리 언론사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말이다. 여기엔 보수니 진보가 따로 없다. 신문도 방송도 마찬가지다. 우리 언론사나 기자들이 종군기자란 말을 무슨 훈장처럼 여기는 게 아닌가 싶다. 어쩌다 분쟁지로 누가 취재만 갔다 하면 어김없이 ‘종군기자 아무개’, 심지어 ‘종군프로듀서 아무개’란 이름을 달고 나오는 걸 보면. 그러니 리비아 시위를 취재하면서 교전 현장 한 번 보지 못한 신문기자들도 저마다 종군기자였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을 따라다니며 탈레반을 ‘적’이라고 부르던 사진가도 종군기자였고, 이라크의 바그다드 호텔에 앉아 전선 냄새 한 번 맡아본 적 없는 방송기자도 다 종군기자였다. 왜들 그렇게 종군기자란 타이틀에 환상을 지녔을까? 종군기자란 게 뭔지 그 뿌리를 캐보자. 먼저 사전적 의미부터 훑어보자. 한자에서 따온 종군기자(從軍記者)란 걸 풀어보면 말 그대로 ‘군대를 따르는 기자’다. 이 종(從)자는 ‘따른다’거나 ‘쫓는다’는 겉뜻 말고도 ‘복종한다’거나 ‘거역하지 않는다’는 심각한 속뜻을 지녔다. 그러니 이 종군(從軍)이란 말을 쓰는 한 독립성을 생명처럼 여겨야 할 기자가 군대에 복속당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기록으로 볼 때 우리가 이 종군기자란 말을 처음 썼던 건 1949년 국방부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사 기자 20여명을 뽑아 태릉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시킨 뒤 발급했던 ‘종군기자 수료증’이 아닌가 싶다. 이어 한국전쟁 때인 1951년 피난지 대구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기자들이 헌병사령부 소속 종군기자로 전선을 취재한 기록이 있다. 바로 그 시절 군에 소속되어 승전보만을 전했던 그 전령사들이 ‘군대를 따르는 기자’였으니 진짜 종군기자다. 가까이는 2003년 미국의 제2차 이라크 침공 때 미군이 세계 각국 언론사에서 뽑은 기자들을 훈련시킨 뒤 현장으로 데려가서 보여주고 싶은 ‘아름다운 전쟁’만 보여준 이른바 임베드 저널리즘(embedded journalism)에 따라다녔던 이들을 종군기자라고 부를 만하다. 그러나 군대 감시와 비판 기능을 강조하는 현대적 언론관을 놓고 보면 군과 언론은 필연적으로 적대관계여야 정상이다. 그러니 군대가 수행하는 그 전쟁을 취재하는 이들을 종군기자라 부르는 건 기본 개념에서부터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가 겉만 따져본 종군기자다. 한국언론이 그 말 쓰는 건 반역 아닌가 이제 세상을 둘러보며 종군기자란 말의 속살을 파보자. 다른 언어권에서는 이 종군기자를 어떻게들 부를까? 일본은 말 할 것도 없이 우리가 베꼈으니 똑같은 한자를 써서 주군기샤(じゅらぐんきしゃ)라 부른다. 중국은 종(從)자처럼 따른다는 뜻을 지닌 수(隨)자를 써서 쑤이쥔지저(隨軍記者)라 불러왔다. 그러나 같은 아시아권인 인도네시아에서는 와르타완 프랑(Wartawan Perang), 타이에서는 푸스카오송크람() 그리고 버마에서는 싯타딘다욱()처럼 다들 ‘전쟁기자’고 한다. 영어로 워 코러스폰던트(war correspondent), 독일어로 크릭스레포르(kriegsreporter), 프랑스어로 코레스퐁당 드 게르(correspondant de guerre), 스페인어로 코레스폰살 데 게라(corresponsal de guerra)처럼 유럽어권에서도 모두 ‘전쟁기자’로 불러왔다. 이렇게 한국, 일본, 중국을 빼면 모든 언어권에서 전쟁 취재하는 기자를 군대와 한통속으로 묶어 ‘군대를 따르는 기자’로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건 언어·문화적 차이가 아니다. 20명 넘는 아시아·아프리카·유럽 출신 외신판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군대를 따르는 기자’라는 말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종군기자란 말은 19세기 말 일본 군대의 침략전쟁과 함께 자라온 일본 언론에서부터 비롯된 군국주의 용어고 따라서 이건 역사관의 차이다. 그 좋은 본보기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라는 당치도 않는 용어가 또 있다. 일본 군국주의 군대가 조직적으로 저지른 성폭력 피해자들을 두고 ‘군대를 따라다니며 성을 파는 여성’이란 뜻을 지닌 종군위안부로 불러온 나라는 일본과 한국뿐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침략전쟁에 기자들을 동원해 호전 나팔수 노릇을 시키면서 갖다 붙인 말이 종군기자다. 그래서 종군위안부와 종군기자란 건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를 지닌 용어다. 국제사회가 종군위안부를 ‘일본군대의 성노예’로 규정해서 그 피해자들을 불러왔다. 그렇다면 종군기자란 건 ‘보도노예’란 뜻이다. 이래도 종군기자란 꼬리표를 훈장처럼 여기며 감동해야 옳겠는가? 일본 언론이 오늘까지 그 두 용어를 고집하든 말든 그건 그 동네 역사관이다. 다만 군국주의 침략사관을 거부해야 마땅할 한국 언론이 그 두 용어를 그대로 베껴 써왔다는 건 반역이다. 말끝마다 친일을 나무라고 일제 잔재 청산을 외치면서 아직도 일본 군국주의 용어를 가장 많이 쓰는 곳이 언론판이고 기자들이기도 하다. 그 상징이 바로 종군기자란 용어다. 내 경험을 털어놓자면, 나는 20년 넘게 전쟁을 취재하면서 내가 군대를 따라다니는 놈이라고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더욱이 군대에 복종한다거나 굴복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 스스로 종군기자라고 여겨본 적도 없고 종군기자라고 불러본 적은 더욱 없다. 전쟁을 취재하는 기자란 건 시민사회로부터 전쟁의 본질을 캐고 군대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들이다. 따라서 전선에 오른 기자들이 복종할 의무를 지닌 대상은 오직 시민뿐이다. 그래서 기자란 전선에 오르는 순간부터 자신이 속한 국가·민족·종교·인종·정파 같은 건 말할 나위도 없고 자신을 돈 들여 파견한 언론사마저 배반하고 시민 편에 서야 옳다고 믿어왔다. 그러니 군국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종군기자란 말에 강한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군대와 언론의 종속관계를 뜻하는 이 종군기자란 말이 전선을 뛰는 기자들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리는 아주 불쾌한 용어로 들렸다. 진짜 전선을 뛰는 기자들은 자신들이 군언동침에 들지 않는 걸 직업적 명예로 여겨왔다. 그 명예는 자신들을 전선으로 파견한 시민에 대한 예의였다. 군언동침에서 깨어나기 위하여 전쟁보도에서 언론이 독립성을 지니고 군대를 감시하겠다면 기자를 부르는 이름부터 바로잡아야 옳지 않겠는가? 돌아보면 우리 언론에서 고민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1990년대 중·후반 <한겨레21>이 처음으로 머리를 싸맸다. 그 무렵 내 의지와 상관없이 기사에 ‘종군기자 정문태’란 말이 붙어 나갔던 적이 있다. 심한 거부감을 느낀 내게 당시 편집장이 내놓은 대안이 ‘국제분쟁전문기자’였다. 그게 지금까지 우리 언론을 통틀어 종군기자란 말을 대신해보겠다는 유일한 실험이다. 그로부터 몇몇 매체들이 국제분쟁전문기자니 분쟁전문기자 같은 말을 쓰기 시작했다. 근데 사실은 그 국제분쟁전문기자란 말도 너무 거창할 뿐 아니라 전문성이란 게 아주 주관적인 개념이고 보면 썩 어울린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나는 2004년 책을 내면서 종군기자 대신 ‘전선기자’란 말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기자’란 말보다는 좀 더 겸손한 느낌이 드는데다, 무엇보다 전쟁을 일으킨 주범들이 도사린 정치판과 군인들이 치고받는 전쟁터라는 두 전선을 모두 취재영역으로 삼아야 하는 내 현실을 좀 더 폭넓게 담아낼 만한 말이라고 여겼던 까닭이다. ‘정치가 빠진 전쟁 취재는 자위행위다’고 믿어온 내게 전쟁기자라는 말은 너무 전쟁터만을 강조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어쨌든 사회적 공감을 얻을 때까지는 국제분쟁전문기자든 전쟁기자든 전선기자든 뭐가 돼도 좋다. 다만 종군기자란 말은 이쯤에서 버리자는 결심을 독자들과 함께 나눠보고 싶다. 종군기자가 살아 있는 한, 기자들이 군대로부터 영원히 독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군기자가 살아 있는 한, 언론이 군언동침으로부터 영원히 깨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군기자가 살아 있는 한, 전쟁 보도는 파멸적 무장철학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군기자가 살아 있는 한, 시민들이 전쟁의 환상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종군기자를 떠나보내고 전쟁을 일으키는 정부와 그 군대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멋진 이름을 기자들에게 달아줄 때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기자들한테 군대를 따라다니지 말고 시민을 대신해 전쟁을 감시하라고 당당히 요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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