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 넬슨 만델라 1918-2013
▶ 넬슨 만델라가 서거했다. 정의는 마침내 이긴다고, 역사가 그리 말해 준다고…, 우리 아이들에게 말하기 망설여질 때, 그의 95년 생애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만델라는 불의한 인종차별의 사슬을 끊었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존엄을 가지고 사는 ‘무지개 나라’를 꿈꾸었다. 하지만 위대한 꿈은 아직 미완성이다. 우리는 거인의 죽음을 그래서 더 슬퍼한다.
“우리는 마침내 정치적 해방을 이뤘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을 빈곤과 수탈과 고통과 차별의 굴레에서 해방시킬 것을 서약합니다. (중략) 우리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모든 국민이 어떤 두려움도 없이 당당히 걸어가는 사회, 양도할 수 없는 인간 존엄이 보장되는 ‘무지개 나라’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나라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을 경험하는 일이 다시는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1994년 5월10일, 76살의 투사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여러 색깔이 어울려 찬란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무지개 나라’를 역설했다. 수십년간 이 나라를 찢어놓았던 ‘아파르트헤이트’(백인 지배집단의 인종차별주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넬슨 만델라의 삶은 자유와 평등을 위한 불굴의 투쟁 자체였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헌신은 한 세기에 걸친 대하극이자 감동적인 인간 승리의 기록이다.
비폭력 평화투쟁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향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동부의 케이프주 트란스케이에서 태어났다. 2009년 11월 유엔은 이날을 ‘넬슨 만델라의 날’로 제정해 이듬해부터 기념하고 있다. 만델라의 부계는 토착 템부 부족의 추장 가문이다. 만델라라는 성은 친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비롯했다. 만델라의 중간 이름인 ‘롤리랄라’는 모계인 코사 부족의 낱말로 ‘나뭇가지 잡아당기기’ 또는 ‘말썽쟁이’라는 뜻인데, 어렸을 땐 부족 작명에 따른 ‘마디바’란 애칭으로 불렸다. 만델라는 9남4녀의 남매 중 처음으로 학교교육을 받는 혜택을 누렸다. 넬슨이란 영어 이름은 초등학교 교사가 지어주었다.
19살 때인 1937년, 그는 동부 이스턴케이프에 있는 포트헤어대학교에 입학해 평생의 벗이자 동지인 올리버 탐보를 만난다. 그의 첫 대학생활은 1학년 때 학생대표위원회가 학교 정책에 반대하는 동맹휴업에 참여했다가 제적당하면서 끝났다. 만델라는 포트헤어를 떠나 남아공 최대 도시인 요하네스버그의 한 법률회사에 취직한 뒤, 독학으로 법률 공부를 계속했다.
남아공대학의 통신교육으로 법학사 과정을 마친 뒤 25살이던 1943년 비트바테르스란트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만델라는 동급생이자 인종주의 철폐 투쟁의 평생 동지인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조 슬로보와 독일계 유대인 해리 슈바르츠를 만난다. 둘은 뒷날 만델라 정부에서 각각 주택장관과 주미대사를 지냈다.
‘아파르트헤이트’ 내세운
극우 야당 국민당 집권하자
인종차별 철폐운동을 시작
67명 숨진 샤프빌 학살 뒤
도시 게릴라 투쟁 이끌어 국가반역죄로 종신형 선고받고
28년간의 옥중투쟁 벌이는 동안
차별받는 이들의 희망됐던 그는
흑인들이 처음 참여한 대선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 1944년 남아공의 보어인(네덜란드계 백인) 목사인 다니엘 말란이 이끄는 극우 야당인 국민당이 의회에서 ‘아파르트헤이트’ 노선을 주창하자,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해 청년동맹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뛰어들었다. 1948년 국민당의 집권은 서른살 만델라의 삶의 방향을 확정짓는 사건이었다. 2년 뒤인 1950년 아프리카민족회의 청년동맹 의장을 맡은 데 이어, 34살 때인 1952년에는 요하네스버그에서 올리버 탐보와 함께 흑인 최초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해 흑인 인권운동과 법률 서비스를 했다. 그해 12월엔 아프리카민족회의 부의장을 맡았다. 이때만 해도 만델라는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비폭력 평화투쟁을 지향했다. 1956년 만델라는 시민불복종 운동을 벌이고 ‘자유헌장’을 작성한 ‘반역죄’ 혐의로 150명의 동지들과 함께 기소됐다. 5년에 걸친 재판 끝에 1961년 피고들은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는 이듬해 시작될 기나긴 투옥생활의 예고편일 뿐이었다. 1960년 3월엔 아프리카민족회의에서 갈라져 나온 범아프리카회의(PAC)가 주도한 대규모 집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7명이 숨지고 수백명이 다치는 유혈사태(샤프빌 학살)가 벌어진다. 영화 <파워 오브 원>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을 계기로 만델라는 평화시위 운동에서 무장투쟁 노선으로 전환한다. 이듬해인 1961년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 산하에 ‘움콘토 웨 시즈웨’(민족의 창)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초대 사령관에 올랐다. 초기 투쟁 방식은 주로 백인 정부와 군에 대한 사보타주였지만, 그해 첫해 12월 정부 청사 공격을 시작으로 점차 백인 민간인, 군사시설, 산업시설에 대한 도시 게릴라 투쟁을 본격화했다. 남아공 정부와 미국은 이 조직을 테러조직으로 규정하고 무력대응에 나섰다. 데클레르크 대통령과 노벨평화상 공동수상 만델라는 44살이던 1962년 8월 요하네스버그에서 거주지 이탈 및 파업 선동 혐의로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고 프리토리아 감옥에 갇혔다. 1964년에는 국가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로벤섬 감옥에서 기나긴 옥중투쟁이 시작됐다. 감옥에 갇힌 만델라는 철저히 격리되고 차별받는 남아공 흑인사회의 정신적 지주이자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동안 ‘민족의 창’은 1980년대 남아공 백인정권을 상대로 집중적인 게릴라전을 펼쳤다. 1982년 케이프타운 인근의 핵발전소 공격, 1984년 수도 프리토리아에 있는 공군본부를 겨냥한 폭파 사건, 1986년 더반에서의 자동차 폭탄 공격 등이 대표적이다. 도로변 지뢰매설 공격도 병행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들도 생겼다. 만년에 만델라는 이처럼 무차별적인 무장투쟁이 인권을 침해했다고 인정했다가 ‘변절’ 논란을 낳기도 했다. 1989년 남아공 대선에서 극우 국민당 후보이면서도 인종차별 철폐 등 개혁 노선을 내세운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가 당선됐다. 데클레르크 대통령은 이듬해인 1990년 2월 마침내 만델라의 석방을 전격 단행했다. 수감 28년 만이었다. 백인 소수 권력층이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끈질긴 저항과 국제사회의 압박, 더는 감당하기 힘든 사회적 갈등과 비용에 굴복한 것이다. 만델라는 석방 일성으로 “무장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더는 무장투쟁이 필요없도록 흑백간 정치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다. 남아공의 평화는 흑인들의 광범위한 참정권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듬해 만델라는 합법화된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 자격으로 데클레르크 정부와 수차례 협상을 통해 임시정부 헌법안을 기초했다. 둘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한다. 만델라는 수상 연설에서 “우리는 이 상이 지나간 과거사에 대한 칭찬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며 “지금도 우리는 온 세상에서 차별 시스템의 종식을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말했다. 1994년 남아공 흑인들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자유 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승리했다. 만델라는 오랜 흑백 차별의 나라에서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76살의 만델라는 대통령 취임 직후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출범시켜, 수십년간 나라를 할퀸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의 초석을 다지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뿌리 깊은 백인우월주의에 젖은 이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억눌렸던 흑인들의 요구도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의 대통령 임기 5년은 이런 갈등을 수습하고 왜곡된 사회 구조를 개혁하는 과도기적 성격이 짙었다. 만델라는 타고난 건강체질이었지만, 엄청난 격무와 스트레스를 감당하기엔 너무 고령이었다. 퇴임 2년 뒤인 2001년(83살)에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노쇠해진 몸도 그의 정열까지 갉아먹진 못했다. 2007년 만델라는 89살의 나이로 세계의 주요 지도자들과 ‘디 엘더스’(The Elders)라는 자문그룹을 구성했다. 말 그대로 ‘원로들’이란 뜻이다. 데즈먼드 투투(주교), 코피 아난(전 유엔 사무총장), 엘라 바트(인도 인권운동 변호사), 지미 카터(전 미국 대통령), 리자오싱(전 중국 외교부장), 메리 로빈슨(전 아일랜드 대통령), 무함마드 유누스(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 설립자) 등이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우리가 무관심과 냉소, 이기심 탓에 휴머니즘이라는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지 못했다는 말이 미래 세대에게서 나오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합시다. 인도주의가 더이상 인종주의와 전쟁이라는 별이 없는 한밤중에 묶여 있을 수는 없다고 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말이 옳았음을 우리가 증명하도록 노력합시다. 진실한 형제애와 평화가 금과 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값지다고 말한 그가 단순한 몽상가가 아니었음을 우리 모두가 증명하도록 노력합시다.” 만델라가 1993년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했던 절절한 호소는 이제 후대 인류의 과제로 남았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극우 야당 국민당 집권하자
인종차별 철폐운동을 시작
67명 숨진 샤프빌 학살 뒤
도시 게릴라 투쟁 이끌어 국가반역죄로 종신형 선고받고
28년간의 옥중투쟁 벌이는 동안
차별받는 이들의 희망됐던 그는
흑인들이 처음 참여한 대선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 1944년 남아공의 보어인(네덜란드계 백인) 목사인 다니엘 말란이 이끄는 극우 야당인 국민당이 의회에서 ‘아파르트헤이트’ 노선을 주창하자,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해 청년동맹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뛰어들었다. 1948년 국민당의 집권은 서른살 만델라의 삶의 방향을 확정짓는 사건이었다. 2년 뒤인 1950년 아프리카민족회의 청년동맹 의장을 맡은 데 이어, 34살 때인 1952년에는 요하네스버그에서 올리버 탐보와 함께 흑인 최초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해 흑인 인권운동과 법률 서비스를 했다. 그해 12월엔 아프리카민족회의 부의장을 맡았다. 이때만 해도 만델라는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비폭력 평화투쟁을 지향했다. 1956년 만델라는 시민불복종 운동을 벌이고 ‘자유헌장’을 작성한 ‘반역죄’ 혐의로 150명의 동지들과 함께 기소됐다. 5년에 걸친 재판 끝에 1961년 피고들은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는 이듬해 시작될 기나긴 투옥생활의 예고편일 뿐이었다. 1960년 3월엔 아프리카민족회의에서 갈라져 나온 범아프리카회의(PAC)가 주도한 대규모 집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7명이 숨지고 수백명이 다치는 유혈사태(샤프빌 학살)가 벌어진다. 영화 <파워 오브 원>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을 계기로 만델라는 평화시위 운동에서 무장투쟁 노선으로 전환한다. 이듬해인 1961년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 산하에 ‘움콘토 웨 시즈웨’(민족의 창)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초대 사령관에 올랐다. 초기 투쟁 방식은 주로 백인 정부와 군에 대한 사보타주였지만, 그해 첫해 12월 정부 청사 공격을 시작으로 점차 백인 민간인, 군사시설, 산업시설에 대한 도시 게릴라 투쟁을 본격화했다. 남아공 정부와 미국은 이 조직을 테러조직으로 규정하고 무력대응에 나섰다. 데클레르크 대통령과 노벨평화상 공동수상 만델라는 44살이던 1962년 8월 요하네스버그에서 거주지 이탈 및 파업 선동 혐의로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고 프리토리아 감옥에 갇혔다. 1964년에는 국가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로벤섬 감옥에서 기나긴 옥중투쟁이 시작됐다. 감옥에 갇힌 만델라는 철저히 격리되고 차별받는 남아공 흑인사회의 정신적 지주이자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동안 ‘민족의 창’은 1980년대 남아공 백인정권을 상대로 집중적인 게릴라전을 펼쳤다. 1982년 케이프타운 인근의 핵발전소 공격, 1984년 수도 프리토리아에 있는 공군본부를 겨냥한 폭파 사건, 1986년 더반에서의 자동차 폭탄 공격 등이 대표적이다. 도로변 지뢰매설 공격도 병행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들도 생겼다. 만년에 만델라는 이처럼 무차별적인 무장투쟁이 인권을 침해했다고 인정했다가 ‘변절’ 논란을 낳기도 했다. 1989년 남아공 대선에서 극우 국민당 후보이면서도 인종차별 철폐 등 개혁 노선을 내세운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가 당선됐다. 데클레르크 대통령은 이듬해인 1990년 2월 마침내 만델라의 석방을 전격 단행했다. 수감 28년 만이었다. 백인 소수 권력층이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끈질긴 저항과 국제사회의 압박, 더는 감당하기 힘든 사회적 갈등과 비용에 굴복한 것이다. 만델라는 석방 일성으로 “무장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더는 무장투쟁이 필요없도록 흑백간 정치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다. 남아공의 평화는 흑인들의 광범위한 참정권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듬해 만델라는 합법화된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 자격으로 데클레르크 정부와 수차례 협상을 통해 임시정부 헌법안을 기초했다. 둘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한다. 만델라는 수상 연설에서 “우리는 이 상이 지나간 과거사에 대한 칭찬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며 “지금도 우리는 온 세상에서 차별 시스템의 종식을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말했다. 1994년 남아공 흑인들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자유 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승리했다. 만델라는 오랜 흑백 차별의 나라에서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76살의 만델라는 대통령 취임 직후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출범시켜, 수십년간 나라를 할퀸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의 초석을 다지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뿌리 깊은 백인우월주의에 젖은 이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억눌렸던 흑인들의 요구도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의 대통령 임기 5년은 이런 갈등을 수습하고 왜곡된 사회 구조를 개혁하는 과도기적 성격이 짙었다. 만델라는 타고난 건강체질이었지만, 엄청난 격무와 스트레스를 감당하기엔 너무 고령이었다. 퇴임 2년 뒤인 2001년(83살)에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노쇠해진 몸도 그의 정열까지 갉아먹진 못했다. 2007년 만델라는 89살의 나이로 세계의 주요 지도자들과 ‘디 엘더스’(The Elders)라는 자문그룹을 구성했다. 말 그대로 ‘원로들’이란 뜻이다. 데즈먼드 투투(주교), 코피 아난(전 유엔 사무총장), 엘라 바트(인도 인권운동 변호사), 지미 카터(전 미국 대통령), 리자오싱(전 중국 외교부장), 메리 로빈슨(전 아일랜드 대통령), 무함마드 유누스(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 설립자) 등이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우리가 무관심과 냉소, 이기심 탓에 휴머니즘이라는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지 못했다는 말이 미래 세대에게서 나오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합시다. 인도주의가 더이상 인종주의와 전쟁이라는 별이 없는 한밤중에 묶여 있을 수는 없다고 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말이 옳았음을 우리가 증명하도록 노력합시다. 진실한 형제애와 평화가 금과 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값지다고 말한 그가 단순한 몽상가가 아니었음을 우리 모두가 증명하도록 노력합시다.” 만델라가 1993년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했던 절절한 호소는 이제 후대 인류의 과제로 남았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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