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스위스·독일, 역외탈세 방지 공조
‘버진아일랜드’ 폭로 이후
재산을 나라 밖으로 몰래 빼돌린 세계적 갑부들의 명단이 폭로됐다. 이들을 도운 세계 유수의 은행 및 중개업체의 정체도 드러나고 있다. 각 나라 정부는 조세피난을 근절하겠다며 대책 마련에 나섰다. 지난 4일 국제탐사언론인협회(ICIJ)의 ‘버진아일랜드 스캔들’ 보도(<한겨레> 5일치 16면) 이후 일어난 일이다. 한국인 또는 한국 기업의 명단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시간 문제로 보인다. 탐사협회는 후속 보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올해는 물론 2014년까지 보도를 계속 하겠다”고 밝혔다.
룩셈부르크·스위스·독일, 역외탈세 방지 공조
■ 세계를 움직인 폭로 버진아일랜드 스캔들의 후폭풍은 유럽에서 특히 거세다. 룩셈부르크는 자국 은행을 이용한 외국인들의 탈세를 막기 위해 은행의 투명성을 강화하기로 했다고 영국 <비비시>(BBC)가 7일 보도했다.
뤼크 프리덴 룩셈부르크 재무장관은 독일 언론과 인터뷰에서 “(역외 탈세를 막기 위해) 외국 과세 당국과 공조를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리덴 장관의 발언은 최근 조세피난처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압박을 의식한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해외자금 유치를 위해 자본소득에 대한 저세율과 ‘고객 비밀주의’ 정책을 고수해왔다. 이 나라의 금융업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20배에 이른다.
앞서 대표적 조세피난처 가운데 한 곳인 스위스도 미국, 독일과 탈세방지 협약을 체결하고 스위스 은행들이 보유한 미국인과 독일인의 계좌 정보를 제공하기로 했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조세피난은 범죄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조세피난처와 싸우겠다”고 밝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 초 유럽연합(EU) 국가들에 역외탈세에 대한 국제공조에 나설 것을 촉구하며, 올 상반기 안에 역외탈세 공조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탐사협회의 보도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 일가의 버진아일랜드 비밀 계좌가 드러나자, 필리핀 정부는 관련 조사를 시작했다. 역시 비밀계좌가 폭로된 몽골 국회 부의장 바야르적트 상가자브는 사임을 발표했다. 탐사협회는 ‘비밀계좌를 운용해온 말레이시아 정치인’에 대한 보도를 이미 예고한 상태다. 폭풍은 아시아로 번지고 있다.
미국기업 1조6천억달러 조세피난처에 은닉
■ 드러나는 조세피난의 정체 탐사협회 등의 보도를 보면, 역외 서비스업체의 도움을 받은 조세피난의 메커니즘이 드러난다. 조세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인 자회사를 설립해 본사에서 발생한 수익을 자회사로 이전하면 조세피난처의 세율에 따라 세금을 적게 내거나 거의 내지 않게 된다. 반대로 조세피난처를 이용해 자금을 조달한 뒤 여기에서 발생한 비용을 본사가 위치한 고세율 국가로 이전시키면 비용 처리에 따른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수법에 이용되는 페이퍼 컴퍼니가 버진아일랜드에만 80만개가 넘는다.
<이코노미스트>는 전 세계 무역액의 50~60%가 이처럼 페이퍼 컴퍼니인 자회사를 이용한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전했다. 구글의 경우 2011년에 100억달러를 조세피난처인 버뮤다에 있는 자회사로 이전시켜 20억달러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 미국 기업들은 조세피난처에 1조6천억달러를 은닉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관세청은 2011년 조세피난처로 자체 분류한 국가나 지역으로부터 수입 통관 때 신고된 금액은 모두 429억달러였으나, 실제 대금지급 총액은 1317억달러였다고 밝혔다. 889억달러(약 103조원)가 조세피난처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전 세계 개인 금융자산의 8%가 조세피난처에 은닉돼 있고, 이 가운데 4분의 3은 계좌에 관한 기록이 없다며, 최근 “그리스·이탈리아·프랑스 등의 거부들이 역외탈세로 빼돌린 돈만 제대로 환수하면 유로존은 지금 채무국이 아니라, 채권국이 됐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USB·BNP 등 세계 주요 은행 탈세 도움”
■ 중단없는 후속보도 탐사협회는 홈페이지(www.icij.org)를 통해 관련 기사를 연일 쏟아내고 있다. 지난 4일 밤엔 “조세피난과 관련된 수천명 가운데 일부”라며 28개 나라의 정치인·군인·왕족·부호·기업인 28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비드지나 이바니슈빌리 조지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말레이시아 총리의 아들 미르잔 빈 마하티르, 탁신 친나왓 태국 전 총리의 전 부인 포자만 나폼베지라 등이 포함됐다. 이밖에 파키스탄·콜럼비아·미얀마의 전 총리·부총리·대통령 일가, 베네수엘라의 육군 장성, 요르단 유력 은행의 총수, 우크라이나의 천연가스회사 회장, 쿠웨이트 왕족 등도 ‘조세피난자’ 명단에 등장했다.
15개월 동안 탐사협회와 ‘협력취재’를 벌인 서구 유력 언론들은 독자 보도를 이미 시작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독일 <쥐드도이체 차이퉁> 등은 7일, 헤지펀드의 거물 라즈 라자라트남, 독일 자동차기업 오펠의 상속자인 군터 작스 등이 거액의 재산을 버진아일랜드에 숨겨뒀다고 폭로했다.
명단 공개와 함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보도도 이어지고 있다. 버진아일랜드 등에 재산을 숨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역외 서비스업체 수십 곳이 성업 중이고, 이들의 주 고객은 미국과 유럽의 다국적 기업이거나 아시아의 대기업들이라고 탐사협회는 폭로했다. 스위스의 유비에스(UBS), 독일의 도이체방크, 프랑스의 비엔피(BNP)파리바 등 세계 유수 은행들이 고객들에게 조세피난 또는 탈세를 도운 것으로 지목됐다.
‘한·중·일 블랙리스트’ 공개 여부 촉각
■ 섬에 돈 숨긴 한국인·한국기업 “재산을 은닉한 170여개 나라 수천여명의 명단이 있다”고 탐사협회는 밝힌 바 있다. 지금까지 공개된 수십여명의 인물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뜻이다.
한국인 또는 한국기업 명단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중국·일본의 개인 또는 기업의 명단도 공개되지 않았다. 탐사협회 등이 동아시아 3국에 대한 보도를 늦추고 있거나, 이들에 대한 분석을 미처 끝내지 못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는 대목이다. 탐사협회의 여러 기사 가운데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조세피난을 돕는 최대 규모의 중개업체인 ‘포트컬리스 트러스트넷’의 고객 7만7000여명 가운데 4만5000여명이 동아시아 출신이라는 것이다. 관련 자료를 확보한 탐사협회 등이 후속 보도에서 ‘동아시아의 블랙 리스트’를 집중적으로 보도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국 정부는 탐사협회에 관련 자료 공유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탐사협회는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 독일, 그리스, 캐나다, 미국 정부가 자료에 대한 접근권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독립 언론기관이자 탐사보도와 공공의 가치에 복무하는 우리는 독자적 보도를 계속 하겠다”고 밝혔다.
탐사협회는 “‘원자료’를 공개해달라는 요청이 있지만, 법률·언론·기술 분야에 걸친 문제가 있다. (이번 주까지) 2주에 걸친 보도에 뒤이어 각 나라별 추적 보도가 이어질 것이고, 올해 내내, 필요하다면 내년까지 보도를 계속 하겠으며, 이 과정에서 각 기사에 연관된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당분간 탐사협회의 주도 아래 폭로를 이어가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안수찬 이춘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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