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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부탄 귀향 18년 기다렸는데…다시 타국행

등록 2008-11-13 20:04

네팔 동부의 벨당기2 난민 캠프에서 지난 7일 미국에 재정착하러 떠나는 버스에 올라탄 한 여성이 출발 전 친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눈물을 닦고 있다.
네팔 동부의 벨당기2 난민 캠프에서 지난 7일 미국에 재정착하러 떠나는 버스에 올라탄 한 여성이 출발 전 친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눈물을 닦고 있다.
부탄 난민 ‘난민촌 떠나던 날’
19세기 부탄 정착 네팔계
불교개종 거부했다고 추방
10만 난민 귀환 원했지만
제3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이제 막 떠오른 태양이 미쳐 대기를 따뜻히 데우기도 전인 이름 아침. 지난 7일 오전 6시, 네팔 동부의 부탄 난민촌 중 하나인 벨당기2 캠프. 한창 물을 길어 밥지을 준비에 분주해야 할 시간, 난민촌 주민들이 일손을 놓은 채 한 오두막 앞을 서성거렸다. 대나무로 얼기설기 얽은 방 두 칸짜리 오두막 안에선 시톰 모굴(18)과 그의 여덟 식구가 호롱불 하나만 달랑 켜놓고 짐싸기에 분주했다. 이날 모굴과 그의 부모, 누나 2명 등 가족 5명이 미국 시카고로 떠난다. 할머니와 두 형도 몇 달 안에 미국으로 합류할 예정이지만, 흐릿한 호롱불에 비친 가족들의 얼굴엔 착찹한 그림자가 짙었다. 몇 분 만에 뚝딱, 17년 고된 타향살이가 4개의 가방에 차곡차곡 포개졌다. 고작해야 옷가지와 그냥 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 말 없이 떠나는 자식들의 이마에 붉은색 ‘티카’(행운과 건강 기원)를 발라주던 모굴의 할머니가 끝내 참았던 눈물을 떨궜다.

시카고. 난민 생활을 접고 새 삶을 시작하기로 결정하며 처음 접한 지명이다. 태어나자마자 부모 등에 업혀 네팔의 캠프로 왔던 시톰에겐, 벨당기2 캠프가 세상의 전부였다. 고향 부탄은커녕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도 한 번 못 가본 그였다. 그에게 미국에 가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전부요. 그곳에 가면 뭔가 새로 시작할 게 있겠죠?” 열아홉 생일을 미국에서 맞게 된 그의 표정은 달떠 있었다.

모굴의 가족을 비롯해서 이날 벨당기 캠프(115명) 등의 부탄 난민 144명이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지난해 11월부터 이국땅으로 떠나는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 이젠 일주일에 몇 차례씩 이별이지만, 주민들은 그때마다 이렇게 몰려나와 눈물을 찍어낸다. “친한 사람들은 다 떠나고 이제 우리만 남았네요.” 국제이주기구(IOM)가 마련한 차량에 올라타는 친구를 지켜보던 파비트라 모고르(25·여)가 말했다. 그의 가족도 이미 재정착 신청서를 낸 상태다.

부탄에서 네팔로, 다시 네팔에서 머나먼 이국땅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시련이 시작된 건 1990년부터다. 19세기 부탄으로 이주한 네팔계 로트샴파스족은 부탄의 종카어 대신 네팔어를 사용하고, 부탄의 국교 불교로 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민권을 뺏긴 채 쫓겨났다. 마을의 지도자가 붙들려 가고, 공무원들은 일자리를 뺏겼다. 모진 고문에 못이겨 사람들이 쓰러져나가자 서너 가정이 친척을 찾아 네팔 동부를 찾아온 게 오랜 타향살이의 시작이었다. 네팔 정부는 같은 민족인데다 동일한 언어를 쓰는 부탄 난민들을 말없이 수용했고, 난민들은 1991년 그곳에서 첫 난민촌인 티마이 캠프를 세웠다.

잠시 피해 있을 요량으로 시작했던 난민촌 생활은 어느덧 18년에 접어들었고, 캠프도 7곳으로 증가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꼽는 난민들은 이 시간을 “버려진 시간”이라고 부른다. 버려진 시간에도 새 생명은 끊임없이 태어났다. 지난 10월30일, 난민촌의 막둥이 비벡 비수아가 태어나는 등, 8만명이던 난민 수는 10만8천여명으로 불었다.

부탄에서 장사를 하며 중산층 생활을 누렸던 대다수 난민들은 줄곧 귀환을 열망했다. 하지만 고향 부탄은 이런 난민들의 요구에 귀를 막았다. 부탄에선 지난 3월 왕명이나마 첫 민주적 선거가 실시되고, 지난 6일엔 옥스퍼드대학 출신 젊은 왕이 새로 취임하는 변화가 있었지만, 난민 문제에 있어선 ‘원래 네팔인이었던 이들이 네팔로 돌아갔을 뿐’이란 입장을 지키고 있다. 네팔과 부탄 두 나라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왔던 인도마저 중립적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집으로 가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지는 듯 했다.


계속된 정부간, 기구간 협상이 실패로 끝난 뒤 국제 사회는 이들 난민을 제 3국으로 재정착(Resettlement)시키자는 대안을 내놓았다. 타이에 있던 미얀마 난민이나, 아프리카 일부 국가 난민들도 제 3국으로 재정착한 사례가 있긴 하지만, 10만명이나 되는 대규모 난민을 제 3국에 수용토록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2006년 미국이 6만명의 부탄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돌파구가 마련됐다. 이후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덴마크·노르웨이·네덜란드도 대열에 합류했고, 네팔 정부도 2007년 12월부터 출국 비자 발급 등을 돕겠다고 나섰다. “난민이란 ‘짐’을 전 세계가 함께 나눈다”는 인식이 받아들여진 것이란 게 유엔난민기구(UNHCR)의 설명이다.

난민촌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지만, 정작 난민들은 이 조처를 마뜩찮게 여겼다.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공작”이란 의혹이 번진 탓이다. 난민해방군(RLA)이 중심이 된 재정착 반대운동까지 일어났다. 2007년 5월엔 재정착에 관심을 보였단 이유만으로 난민촌의 유명한 캠프 지도자가 구타를 당했고, 2008년 5월엔 국제이주기구(IOM) 건물에 사제 폭탄을 투척하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대안 없는 난민촌 생활을 계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날이 갈수록 부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단 인식이 확산되면서 재정착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늘고 있다. 지난해는 재정착을 떠난 이가 2명(캠프내 성폭력 피해자)에 불과했지만, 올해 10월까지 그 수는 6천명으로 증가했다. 다른 나라에 재정착한 이들이 속속 소식을 전해오면서, 나가서도 살만하겠단 자신감도 커졌다. 이에 힘입어 지난 5~8월엔 매달 5천명 가량이 재정착 신청을 하는 등, 전체 난민수의 절반이 넘는 6만명이 재정착 신청 뜻을 밝혔다. 이중 2만4천명은 이미 재정착 대상국가 7개국에 신청서가 접수된 상태다.

재정착을 선택한 데는 무엇보다도 더는 아이들을 캠프 안에만 묶어 둘 순 없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현재 7개 캠프 전체에 17살 이하 아이들만 40% 이상이 넘는다. 아이들은 캠프 안에서 고등학교 과정(10학년)을 끝낸 뒤 마을로 나가 플러스2 과정(11~12학년) 이상을 공부하지만, 정작 배운 걸 활용할 기회는 없다. 네팔 안에 머물 권리는 있지만 합법적으로 일할 권리까지 보장받진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허망한 가슴을 달래거나 그저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엔 달리 할 일이 없다.

1991년 부탄에서 넘어온 자낙 날 시와코티(54)는 그런 자식들을 보면서 “떠밀리듯 재정착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오렌지 도매상을 하며 3층짜리 집을 짓고 떵떵거리며 살던” 부탄 시절로 돌아갈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다막(네팔)/글 사진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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