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소지·체포권 없이 34명서 출발
대테러전 거치며 4만명 규모 육박
대테러전 거치며 4만명 규모 육박
수사기관의 대명사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26일 창설 100돌을 맞는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에프비아이의 날’로 선포한 지난 17일부터 에프비아이는 다채로운 축하행사를 열고 있다. 누리집에 올라온 지난 100년간 주요 사건 일지나, ‘오해와 진실’ 등 게시물도 관심을 끌었다.
1908년 창설 당시 에프비아이는 찰스 보나파르트 법무장관의 지시로 꾸려진 법무부 산하조직이었다. 정경유착의 고리로 지목된 ‘화이트칼라’ 범죄가 당시 ‘특수요원’ 34명의 주요 수사 대상이었다. 처음엔 총도 없고, 체포도 못하는 단순 수사조직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 특수요원 1만2천여명 등 인원 3만8천여명에 연간 예산 약 87억달러의 막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에프비아이는, 지난 한 세기 속에 벌어진 무장강도와 대규모 금융사기, 심지어 전쟁 등 대형사건들 속에서 몸집과 영향력을 불렸다.
민심이 흉흉했던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당시 ‘수사국’은 유명세를 누리던 강도들과 싸웠다. 21살과 19살 연인으로 중남부 지역을 휩쓴 전설적 강도 ‘보니 앤 클라이드’ 등이 수사국의 맞수였다. 1933년 은행강도를 호송하던 요원이 무장괴한의 총에 맞아 숨지는 일이 일어나, 의회는 논란 끝에 요원들에게 총기소유권과 체포권을 부여했다. 이즈음 수사국은 연방수사국으로 명칭을 바꿔 명실공히 미합중국 최고의 수사기관이 됐다. ‘로빈후드’로 대중적 명성을 누린 탈옥수·은행강도 존 딜링거를 사살한 것도 이때의 ‘성과’였다.
무력충돌과 정보·탐색전이 횡행한 2차 세계대전은 에프비아이가 몇백명 수준에서 1만3천여명 규모로 확대된 계기였다. 냉전 때는 소련 간첩 혐의로 처형된 로젠버그 부부 등 스파이들이 에프비아이의 상대였다. 1960년대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미시시피주에서 민권운동가 세 명이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쿠클럭스클랜’(KKK)에 살해된 이른바 ‘미시시피 버닝’ 사건도 에프비아이가 수사를 주도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불러온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도 에프비아이의 몫이었다.
에프비아이의 맹활약 이면에는 ‘비밀경찰’ ‘인종차별’이란 오명이 있다. 그 어두운 역사 한가운데 1948~72년까지 재임한 에드거 후버 국장이 있다. 그는 창설 초기 부패로 치닫던 수사국 조직을 개편해 새로운 역사를 열었고, 대통령이 8차례 교체되도록 물러나지 않고 죽는 그날까지 자리를 지켰다. 후버 국장은 훗날 정·관계 유명인사들의 약점을 잡아 협박을 일삼았고, 숱한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여성 편력 의혹을 제기하며 민권운동을 방해하려 했던 이도 후버였다.
9·11 동시테러 이후, 에프비아이는 대테러전쟁 국면 속에서 연방 차원의 수사를 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로버트 뮬러 국장은 지난주 <시비에스>(CBS)와의 인터뷰에서 “이젠 범죄가 일어난 뒤 좇아가는 게 아니라, 테러가 일어나기 전에 테러범을 붙잡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여전히 재래적인 수사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는 에프비아이와 중앙정보부(CIA)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9·11 참사를 사전에 방지할 기회를 놓쳤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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