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은 지금 누가 뭐래도 ‘보수의 시대’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최측근 칼 로브는 얼마 전 강연회에서 “2004년 대선은 보수주의 가치의 승리”라고 외쳤다. 이런 보수의 시대에 진보의 색깔을 유지하는 건 가능하고 또 도움이 되는 일인가.
진보진영은 다시 한번 하워드 딘에게서 희망을 찾는 것 같다. 칼 로브의 연설이 있기 며칠 전인 지난 12일, 그는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의장에 뽑혔다. 그의 선출 이후 수많은 진보 잡지와 웹사이트들은 딘이 이끄는 민주당의 앞날을 그려보느라 여념이 없다. 〈에이피통신〉은 “진보단체들이 딘을 주시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딘은 지난 대선 때 반전 메시지로 민주당 경선 선두주자로 떠올랐다가, 결정적 순간에 존 케리에게 밀렸다. 너무 왼쪽에 치우쳤다는 불안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비슷했다. 딘의 전국위 의장 당선이 확실시되자, 민주당 의회 지도자들은 창백한 표정으로 몸서리를 쳤다고 한다. 보수 성향의 잡지 〈뉴리퍼블릭〉의 조나산 체이트는 “딘은 (보수화된 미국사회에서) 민주당이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의 정확한 대척점에 서 있다”고 평했다. 그런 딘에게 진보진영이 다시 기대를 거는 건 두가지 점인 것 같다.
민주당 전국위 의장을 뽑는 투표권자는 447명에 불과하다. 전국 50개 주 당원 가운데서도 핵심 중의 핵심이다. 당 중진들의 영향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의회 중진들의 뜻과 달리 하워드 딘이 선출된 건, 그만큼 워싱턴 의회와 기층 당조직이 유리돼 있다는 걸 뜻한다.
“(대선을 비롯한 모든) 선거란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아니라, 사실은 ‘워싱턴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싸움”이란 분석은 나름의 일리가 있다. 조지 부시가 두차례나 질 것 같은 싸움을 승리로 이끈 건, 앨 고어나 존 케리보다 아웃사이더 이미지가 훨씬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열정이다. 당 전국위 의장은 지금까지 그리 중요한 자리가 아니었다. 평시에 당을 관리한다고 하지만, 집권당에선 대통령이 지명하는 자리다. 야당도 의회 중진과 잠재적 대선후보들이 대체로 의견을 모아서 특정인을 전국위 의장으로 만든다. 그래서 전국위 의장을 실권 없는 ‘고무도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딘은 다르다. 딘이 선출된 뒤 전국위 의장은 일약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는 자리가 됐다. 그는 워싱턴에만 앉아있는 게 아니라 전국을 계속 돌아다닌다. 밑바닥 당원들에게 ‘민주당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런 쉼없는 노력이 그에게 기대를 걸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거대한 보수의 흐름 속에 발로 뛰는 딘의 모험이 성공할지 장담하긴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민주당과 진보진영이 희망을 살릴 근거는 마련한 것 같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