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국가가 전기차 보조금은 축소하지만 충전소 확대에는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서울 대형 쇼핑몰 내 전기차 충전소 모습. 연합뉴스
“저는 이제 낡은 사람입니다.”
지난 1월, 도요다 아키오 당시 도요타자동차 사장(현 회장)은 “미래 모빌리티(이동수단)의 새로운 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제가 한발 물러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도요다 사장이 자신의 후임 최고경영자(CEO)로 지명한 이는 2000년대 초반부터 도요타의 고급 브랜드 ‘렉서스’ 개발과 경영을 책임졌던 사토 고지(53) 집행임원이었다.
도요다 사장이 자신을 ‘낡은 사람’이라고 규정하며 퇴진을 선택한 것은 도요타가 시장의 격변에 대응하려면 새 사람이 경영 일선에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10년대 도요타를 업계 세계 1위로 끌어올린 도요다 사장이 천착했던 것은 내연기관의 효율을 극대화한 하이브리드 자동차였다. 옛 사람인 자신의 능력으로는 최근 전기차가 주도하고 있는 ‘모빌리티 혁명’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느낀 것이다.
하지만 퇴진 결단을 내린 지 불과 9개월 뒤 열린 재팬모빌리티쇼에 등장한 도요다 전 사장은 열기가 한풀 꺾인 전기차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마침내 현실을 보고 있다.”
■ 반전의 반전
전기차가 최근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인류의 미래를 바꿀 ‘혁신의 아이콘’으로서가 아니었다.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 소재를 둘러싼 미-중 갈등 때문이었다. 미국은 지난해 여름 ‘칩과 과학법’(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을 잇따라 내놓으며, 미래 산업을 이끌어갈 반도체와 배터리 두 시장에서 중국을 강하게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도 반격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지난 8월 반도체 원료인 갈륨·게르마늄의 수출을 통제한 데 이어, 두달 만인 10월20일엔 2차전지 핵심 소재인 흑연의 수출을 12월1일부터 통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미국 재무부 등은 지난 1일 중국 정부 지분이 25% 이상인 중국 배터리 기업의 외국 합작회사엔 전기차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했다. 자동차 산업의 앞날을 바꾸게 될 전기차 시장이 미-중 전략 경쟁의 주요 무대가 되면서 업계 전체의 불확실성이 커지게 된 것이다. 유럽 시장에선 유럽연합(EU)이 지난 10월 초 중국이 자국 전기차에 과도한 보조금을 주는 것에 대해 ‘불공정 조사’를 시작하는 등 또 다른 분쟁이 고개를 들고 있다.
자동차 업계에선 이런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인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기차가 큰 무리 없이 향후 산업의 대세를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물론,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가 견조한 것은 사실이다. 미국 시장을 보면, 올해 판매된 차량 열에 하나가 전기차(9%)였다. 올해 100만대 이상의 전기차가 팔릴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에선 저렴한 가격을 내세운 중국 업체들의 급성장으로 “전기차가 이미 대중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세계 전체적으로 올해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대비 33% 증가해 1400만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견줘 폴크스바겐, 베엠베(BMW), 메르세데스 벤츠 등 자동차 시장을 쥐락펴락하던 독일 내연기관 업체들이 주춤하는 모습이 도드라지고 있다. 내연기관 차량은 100년 넘게 지켜온 왕좌를 금세 전기차에 내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은 자동차 시장조사업체 모터 인텔리전스 통계를 인용해 “지난해 1분기 전기차 판매량 증가율은 69%였지만 올해 1분기는 51%에 그쳤다”며 “여전히 전체 산업보다 높지만 성장세가 둔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반대로 전기차의 최대 경쟁자인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올해 1∼3분기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8% 늘었다. 지난해 판매량이 6%가량 줄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역주행’이 발생한 것이다. 당장이라도 전기차가 지배하는 세상이 올 것 같았는데, 하이브리드라는 ‘올드보이’가 화려하게 귀환한 것이다.
자동차 업계는 최근 시장 변화에 대해 전기차의 ‘첫번째 물결’이 유행처럼 지나고, 잠재적 구매자들이 높은 차량 가격, 충전의 어려움, 주행거리 제한 등의 이유로 구매를 망설이기 시작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전기차는 그동안 혁신 기술에 대한 호감, 획기적인 유지비 절감, 화석연료 감축 등의 장점 덕에 단시간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려왔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가려 있던 단점 역시 분명했다. 가장 큰 문제는 비슷한 수준의 내연기관 차량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다. 자동차 전문조사업체인 스트래티직 비전은 최근 미국 신차 구매 가구의 평균 소득이 12만2천달러(약 1억5800만원)지만, 전기차는 50% 정도 더 비싼 18만6천달러(약 2억4천만원)라고 집계했다. 전기차를 살 수 있는 이들이 ‘돈 많은 사람’으로 제한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충전의 어려움과 배터리에서 발생하는 원인 모를 화재 등 안전성 문제다. 그로 인해 전기차는 ‘미래’가 아닌 ‘유행’일 뿐이었다는 극단적인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미국 소비자매체 컨슈머리포트는 2021∼2023년식 차량 33만여대 소유자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소비자들이 전기차가 기존 내연차보다 79%나 더 많은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시장 분위기를 감지한 차량 제조업체들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세계 최대 자동차 기업 제너럴모터스(GM)는 지난달 미시간주에 세우기로 예정했던 전기 픽업트럭 공장 설립을 연기했다. 포드 자동차도 전기차 수요가 줄었다며 120억달러 규모의 전기차 설비 확충을 미뤘고, 전기 픽업트럭인 F-150 라이트닝 생산 공장의 인력 감축을 검토 중이다. 혼다는 지엠과의 저가 전기차 공동 개발 계획을 취소했고, 전기차 업계의 ‘얼굴’ 격인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마저 최근 높은 금리를 거론하면서 멕시코 새 공장 건설을 주저하는 듯한 모습이다.
도요타자동차의 미니밴 시에나 2024년형. 업체 쪽은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탑재한 이 차량이 인상적인 연비를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도요타 자동차, AP 연합뉴스
■ 도요타 회장이 옳았을까?
그와 동시에 ‘철 지난 구닥다리’ 취급을 받던 하이브리드 차량의 장점이 새삼 부각되고 있다. 미국 컨슈머리포트는 “하이브리드는 효율과 신뢰성을 모두 갖췄고, 전기차처럼 (충전 방식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생활 방식을 바꿀 필요가 없다”며 “지금으로선 최적의 선택인 것 같다”고 밝혔다.
이 지적대로 도요타의 ‘프리우스’가 대표하는 하이브리드 차량은 안전성과 연료 주입 편의성 등에서 이미 한 세대 가까운 소비자들의 검증을 마쳤다. 심지어 최근 하이브리드 차량은 일반 내연기관 차량과 견줘 볼 때 가격 차이도 크지 않다. 지난달 29일 컨슈머리포트가 낸 업체 신뢰도 조사에서 하이브리드가 주력인 렉서스와 도요타가 1·2위, 테슬라가 14위에 그친 것은 이런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블룸버그통신은 “전기차는 많은 화재를 일으켰지만, 시장에 나온 지 25년이 지난 하이브리드는 간단하고 고장이 잘 나지 않으면서, 내연기관(만 있는) 차량보다 더 나은 연비를 제공한다”고 평가했다. 이 매체의 스티븐 엘릭 자동차 데이터분석 프로그램 책임자는 “자동차 업체들은 오랫동안 하이브리드차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이제 아주 잘 만들 수 있다”며 “도요타와 현대·기아 같은 전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차들을 만드는 업체에서 많은 하이브리드차를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전기차의 도전’이 꺾인 것이라는 평가는 섣부르다. 여전히 미래의 대세인 전기차가 성장통을 앓고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이해다. 아이티 매체 ‘더 버지’는 “세계가 필연적으로 전기차를 채택하겠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정체기로 들쭉날쭉할 것”이라며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이전에 전기차에 대해 낙관적이었던 계획 일부를 조정하고 있으며,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라고 풀이했다.
테슬라와 일합을 겨루고 있는 도요타도 2026년까지 유럽에서 신차 20%를 전기차로 판매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컨슈머리포트의 자동차 부문 수석 책임자인 제이크 피셔는 전기차가 “성장통을 겪으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짚었다.
홍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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