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서머스 하버드 총장 ‘조물주탓’ 발언은 편견인가, 진실인가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라는 베스트셀러가 있다. ‘남자는 신문이나 TV를 볼 땐 아무것도 못 들을까?’, ‘왜 여자는 평행 주차를 그렇게 못할까?’, ‘왜 남자는 여자에게 거짓말을 하면 99% 들통이 날까?’, ‘왜 여자는 수다스럽고 남자는 과묵할까?’…
남녀의 차이를 유전자와 동물적 본능에 따라 풀어낸 책이다. 저자인 앨런 피즈와 바라라 피즈 부부는 이같은 질문에 대해 답한다. 남자가 여자보다 한꺼번에 다양한 일을 못하는 이유는 에스트로겐이라는 호르몬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남자들이 주차를 좀더 쉽게 하는 것은 여성에 비해 공간지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남녀의 능력 차이가 생물학적인 것인가, 사회적인 것인가를 두고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지만 아직까지 속시원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남자는 수만년간 가족 부양을 위한 사냥이나 등을 해왔기 때문이며, 여자는 수만년간 자식을 돌보며 살림을 꾸려왔기 때문’이라며, 남녀간 능력의 차이는 사실상 생물학적 차이라기보다 사회적 기능에 따른 변화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몇몇 여성들은 지도도 잘 보고, 길도 잘 찾는다. 남자들도 오래 혼자 살거나 살림을 꾸려가는 사람들은 여자 못지않은 능력을 발휘한다. 문제는 관심과 필요성 여부다. 즉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를 떠나 개개인의 독창성과 특징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이공계에서 여성이 성공하기 힘든 것을 ‘차별’ 탓으로 돌리지 말라?”
“여성은 ‘선천적으로’ 수학이나 과학에 재능이 없다. 이공계에서 여성이 성공하기 힘든 것을 ‘차별’ 탓으로 돌리지 말라.”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총장이 ‘돌’을 던졌다.
지난해 7월 하버드대 여름학기 개강연설 도중에 “1970년대 서울은 100만 명에 가까운 미성년자가 윤락녀였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던 서머스 총장이 최근에는 매사추세츠공대(MIT)대, 프린스턴대, 스탠퍼드대 총장으로부터 ‘여성비하 발언’으로 공개 비판을 들었다.
지난달 14일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국립경제연구국(NBER) 비공개세미나에 참석한 서머스 총장이 “여성은 선천적으로 과학 능력이 떨어진다”며 여성비하 발언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서머스 총장은 이공계 고위직에 여성이 적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3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첫째, 자녀를 둔 여성은 1주일에 80시간씩 일할 수 없거나 일하기를 꺼린다. 둘째, 고교시절 과학과 수학 우등생 가운데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적으며 이는 남녀간의 선천적 차이 때문일 수 있다. 셋째, 일류대학의 과학·공학계열에 여교수가 드문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 성차별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의문이다.”
그의 발언은 순시간에 퍼졌고, ‘성적 비하’ 발언의 대가는 혹독했다. 서머스 총장은 취임 이래 지난 3년간 하버드대 고위 보직 여성 숫자를 줄여왔다. 발언에 대한 여성계 등의 반발은 확산되었다. 실제 하버드대에서 여성이 정년을 보장받는 정교수로 승격되는 비율은 그의 취임 이래 급격히 하락해 왔으며, 지난해도 정교수 승격자 32명 중 4명만 여성에 배정됐다.
결국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깊이 후회하며 좀더 사려깊게 이를 헤아리지 못한 데 대해 사과한다”고 머리를 조아리며, “여성들에게 모든 문제를 사회적 요인으로 돌리는 데 신중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또 지난 4일에는 하버드대 안에서도 여성 교수를 늘리고 지원하는 두개의 태스크포스팀을 발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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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셜리 콜드웰 틸먼 프린스턴대 총장(분자유전학), 수전 혹필드 매사추세츠 공대 총장(신경과학), 존 헤너시 스탠퍼드대 총장(컴퓨터공학). 좌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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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프린스턴-스탠퍼드대 총장, “서머스 총장 여성비하 발언은 편견 부추겨” 맹폭
가라앉을 것 같았던 파문은 지난13일 프린스턴대, MIT, 스탠퍼드대 등 3개대 총장이 ‘여성은 선천적으로 수학과 과학 능력이 떨어진다’고 발언한 서머스 하버드대 총장을 공개 비판하면서 다시 불거졌다.
셜리 콜드웰 틸먼 프린스턴대 총장(분자유전학), 수전 혹필드 매사추세츠 공대 총장(신경과학), 존 헤너시 스탠퍼드대 총장(컴퓨터공학) 등은 <보스턴 글로브> 12일자에 실은 공동칼럼 ‘여성과 과학: 진짜 쟁점’에서 “여성이 과학과 공학 등에서 뒤지는 이유는 ‘타고난 차이’ 때문이라는 주장은 낡은 신화를 부활시키고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을 강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서머스 총장의 주장은 이미 “1세기 전에 노벨상을 받았던 퀴리 부인이 깨버린 신화”라며 “사회는 ‘여성이 수학·과학·공학을 잘 할 수 있을까’를 묻는 대신 ‘어떻게 하면 이 분야의 능력을 타고난 여성들이 관련 분야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할까’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남녀 차이가 발생하는 데는 “문화적 사회적 요인들이 중요하다”며 “여성에 대한 낮은 기대치는 노골적인 차별만큼이나 파괴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들은 “미국 학생들의 수학능력이 다른 나라 학생들에 비해 뒤떨어져 있는 실정”이라며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재능과 균형감각을 일깨워 주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또 “여성에 대해 기대를 갖지 않는 것은 공공연한 성차별만큼이나 해롭다”며 1966년부터 2001년 사이 미국의 기계공학 여성박사는 0.3%에서 16.9%로, 생물 및 농업분야는 12%에서 43.5%로 증가했다는 수치를 제시하기도 했다.
여성, 수학이나 과학에 재능없나?
‘성적 비하’ 논란을 떠나서 서머스 총장의 발언은 과학적 근거가 있는 말일까. 서머스 총장의 발언을 계기로 남성과 여성의 ‘과학적 재능’의 원인이 생물학적인가, 사회적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많은 여성들은 서머스 총장의 발언에 ‘아니오’라고 답한다. 이들은 여성이 이공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지 못한 이유로 선천적 능력이 남성에 비해 뒤떨어졌다기보다는 사회적 편견과 남성 중심의 과학풍토를 꼽는다.
이를 뒷받침하듯 여성의 지위향상과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과학기술계에도 ‘여성파워’가 몰아쳤다. 우리나라에서 얼마든지 예를 찾을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우리나라 최연소 여성박사 ‘천재소녀’ 윤송이(30)씨. 현재 SK텔레콤 상무로 재직 중이다. 그는 지난 93년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졸업하고 9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수석으로 나와 주목을 받았다. 특히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에서 3년6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해 화제가 됐으며, 그는 드라마 <카이스트>의 실제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외에 세계 2대 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영남대 해양과학연구소 김미경 박사, 삼성SDS 최고정보책임자로 있는 장연아 상무 등도 널리 알려진 여성 과학자다. 최근에는 4년간의 석·박사과정 동안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에 80여편의 논문을 게재한 장미현(28·경희대 의학계열 박사과정 졸업예정)씨도 여성의 과학능력에 대한 의문을 잠재웠다.
이공계 연구밀집소인 대덕연구단지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의 여성의 위상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한국한의학연구원(원장 이형주)은 전체 연구인력의 40% 이상(32명 가운데 13명)이 여성으로 구성돼 있다. 올해도 11명의 신입 연구인력 가운데 4명을 여성으로 선발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원장 양규환) 역시 여성과학자 비율이 20%를 넘었으며,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경우도 매년 1%씩 여성 연구인력이 늘어 2003년 13%, 지난해 14%, 올해 현재 15.3%(38/249명)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전체 연구인력 1천796명 가운데 여성과학자가 228명으로 12.7% 수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도 정부의 ‘여성 연구인력 30% 목표채용’에 따라 적극적으로 여성 인력을 포용할 계획을 갖고 있다. 여성의 이공계 진출을 위한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사례들이다.
김진애 “과학 재능있는 여성 키우기커녕 이상한 눈으로 봐”
하지만 여전히 여성의 이공계 고위직 진출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전길자 전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초대원장(이화여대 화학과 교수)는 “과학 연구에 있어 남성과 여성의 능력차이는 없다”며 “35%를 차지하는 미국의 여성과학인력에 비하면 11% 수준인 우리나라의 여성과학인력 비율은 턱없이 낮은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여성건축가로 유명한 김진애 서울포럼 대표도 “여성의 이공계 진출이 적었던 이유는 수학이나 과학에 재능이 있는 여성을 키우기는커녕 이상한 눈으로 봐왔기 때문”이라며 “남녀를 떠나 개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실시한 수학·과학 성취도 평가에서 우리나라 학생들이 최상위권을 기록했지만, 고1 학생 대상 조사(PISA)에서 한국 남녀 학생의 수학·과학 점수 차이는 41개국 중 두번째로 컸다. 중2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학·과학 성취도 국제비교(TIMSS)에서도 남녀 차이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한국 남녀 학생의 성적 차이가 유독 컸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연구팀도 최근 뇌 구조 연구결과, 남녀의 회색질과 백색질의 지능 관련 부분의 비율이 다른 것이 밝혀져 “남성이 수학 등 논리적 추리능력에서 우수하고, 여성은 언어 등 정보통합능력이 뛰어난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인지 모른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에서 그동안의 과학적 연구결과를 소개하면서 수리능력에서 남녀간에 어떤 차이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보도했다. 과학적 재능에 성별차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논란중이다.
교육현장 편견이 ‘남녀의 이공계 능력차이’ 부추겨
이런 가운데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현직 교사들의 편견이 남녀 학생간 수학·과학 성적차를 불러왔을 수도 있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돼 주목된다. 지난달 초 한국여성개발원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중·고교 교사 10명 가운데 4명이 별다른 근거 없이 ‘남학생이 수학을 잘하는 것은 선천적인 성차 때문으로, 교사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고 답했다.
건축가 김진애씨는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나는 오히려 학창시절 선생님들에게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았고, 개발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며 “공간추리력 등 여성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개발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개발의 기회를 주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이런 설문조사 결과와 관련해 “남편과 나는 같은 공학도이지만 남성이 우월하다고 평가받는 공간추리력은 오히려 내가 더 뛰어나다”며 “과학적 재능의 성별차는 없으며, 개인차만 존재한다. 다만 여성이 상대적으로 이공계적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뿐”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한국 여성인력의 과학기술분야 진출을 높이고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려면 교사와 과학자를 비롯 한국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서머스 총장과 같은 ‘성차별적인 사고’가 먼저 고쳐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