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20일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6차 정치국 회의를 열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가한 가운데 그의 러시아 방문 결과를 논의했다. 22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회의에서는 김성남 당 국제부장이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귀환 보고를 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으로 세계 지정학의 3대 축인 미국-중국-러시아의 삼각관계가 다시 요동치고 있다.
북-러의 전략 관계에 놀란 미국이 중국에 다가서 중국과의 대결 수위를 조절하고, 중국은 러시아와의 연대 카드를 미국에 흔들고 있다. 러시아는 북한 카드로 미국을 자극하는 한편 중국도 견인하려 한다.
삼국 관계는 김 위원장이 지난 10일 평양에서 러시아행 전용 열차에 탑승해 19일 돌아오는 일정을 소화하는 중에 요동쳤다. 미국은 북한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무기를 제공하려 한다며 양국을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마크 밀리 미군 합참의장이 16일 “북한의 무기 제공이 우크라이나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내겠느냐. 나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듯이, 미국에 북-러 관계 자체가 더 큰 의미가 있다.
김 위원장은 13일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담을 비롯해 방러 일정 대부분을 러시아의 우주, 항공, 함대 기지 방문 등으로 채웠다. 북-러 양국의 전략무기 협력이 가시화됐다.
푸틴 대통령은 13일 김 위원장과 회담 전에 ‘러시아가 북한의 우주 위성을 건설하는 것을 도울 것인가’라는 기자들의 물음에 “그것이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라고 답했다. 정찰위성 등 북-러의 전략무기 협력이 진행되면, 이미 미국에 가장 골치 아픈 사안인 북한 핵 문제는 더욱 가중되고 동아시아 세력 균형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미-중-러 관계도 김 위원장이 방러 중이었던 12일 크렘린이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정상회담 연내 개최를 밝히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김 위원장 방러 때 중-러 정상회담 개최를 밝힌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며, 북-중-러 연대를 시사한 것이다. 이어서 19일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가 푸틴 대통령이 다음달 중국에서 열리는 일대일로 포럼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확인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도 김 위원장의 방러가 진행 중이던 16~17일 지중해 섬나라 몰타에서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왕이 중국 공산당 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장관)의 회담이 열렸다. 둘은 이틀에 걸쳐 12시간이나 만나 “솔직하고, 실질적이며, 건설적인 논의를 했다”고 백악관이 밝혔다. 둘은 오는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정상회의 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 주석 사이 정상회담을 조율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 왕 부장은 18일부터 26일까지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 참석해, 미국 쪽과 접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왕 부장은 모스크바로 가기로 일정이 급변했고, 이에 미국이 모스크바로 가는 왕 부장을 붙잡은 것이다.
몰타 회담은 전격적이었으며 상징적이었다. 몰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2월 초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만나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한 곳이다. 미국이 몰타에 왕 부장을 불러들여서 이틀간 마주한 것은 미국이 중국과 관계를 관리하겠다는 신호이다.
미국은 모스크바로 가는 왕 부장에게 견제와 반대급부를 동시에 전달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중국의 대러 지원과 왕 부장의 모스크바 방문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고 밝혔다고 미국 언론들은 전했다. 대신 미국은 지난 5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 이후 재개된 양국의 고위급 접촉의 범위와 빈도를 늘려 양국 현안을 조율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뉴욕에서도 미-중은 밀고 당겼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왕 부장 대신 유엔 총회에 참석한 한정 중국 국가 부주석을 18일 만나 “몇 주 안에 더 높은 수준의 대화를 포함해 대화 채널의 유지를 재확인했다”며 북한과 대만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다고 미 국무부가 밝혔다. 한 부주석은 “안정적인 중-미 관계는 양국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이롭다”며 “중-미 관계를 안정적인 궤도로 되돌리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몰타 회담에서 군사 회담 재개에 대해 중국 쪽으로부터 약간의 관심의 징후가 있었다”고 미국 당국자 말을 인용해 전했다. 중국은 미국이 지난 2018년 9월 리샹푸 국방부장(장관)을 제재 명단에 포함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양국 군사회담을 거부해 왔다. 그런데 최근 리 부장 실각설이 돌면서, 자연스럽게 양국 군사회담을 재개할 여지가 생겼다. 미 국방부도 22일 사이버 공격을 주제로 실무그룹 논의를 개최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13일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나 로켓 조립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모스크바로 간 왕 부장은 중-러 양국의 전략 우호관계를 재확인하면서도 미국과 러시아 양쪽을 상대로 당기고 견제하는 행보를 했다.
왕 부장은 18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만나 “반러, 반중을 담은 미국의 국제무대에서 행동에 대해 양국은 같은 입장에 있음을 확인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20일 푸틴 대통령과의 면담에서는 미국을 겨냥해 “세계는 다극화되고, 경제적 세계화는 역행한다”며 “중·러는 다자간 전략적 조율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밤 늦게 중국 외교부는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는 올해 들어 미국과 서방의 일방적 제재의 충격을 극복하고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며 “중국과의 계획을 강화하고 실질적 협력을 심화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한 사실을 공개했다. 러시아가 중국에 협력강화를 요청했다는 사실을 미국 쪽에 상기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 외교부는 왕 부장이 푸틴 대통령에게 “중·러는 세계의 발전과 진보를 추동하는 중요한 책임을 지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라고 말한 사실도 공개했다. 중·러가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것은 러시아가 북-러 군사협력 관련해 책임있게 행동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러시아를 자제시키는 한편 미국에도 립서비스를 한 것이다.
왕 부장의 방러 동안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이란을 방문해, 양국 군사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쇼이구 장관은 지난 7월27일 북한이 ‘전승절’로 부르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일 기념 행사에 참여해, 양국의 전략관계 재개에 시동을 건 바 있다. 북한에 이어 이란과의 관계를 다시 강조함으로써, 미국이나 중국 양쪽에 다시 신호를 보낸 것이다. 북한과 이란은 미국으로부터 가장 혹독한 제재를 받으나, 지정학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미국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나라들이다.
중국은 러시아 카드를 흔들며 미국을 견제하고, 미국은 중국에 양국 관계 안정을 미끼로 중-러 관계를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는 북한 및 이란 등과의 관계를 통해 중국을 견인하며 미국을 자극하고 있다.
미-중 대결, 중-러 연대, 미-러 충돌 이런 관계는 다음달 중국에서 열리는 푸틴 대통령과 시 주석 회담 그리고 현재 조율 중인 11월 바이든 대통령과 시 주석 회담이 큰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러 사이에 중국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가 일단 첫번째 열쇠이다. 시 주석은 두 정상회담을 통해 중-러 연대를 확인하면서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정치적 해결책을 중재해 미-중 관계의 안정을 도모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이 기본적으로 중국에 대한 전략 대결을 추구하고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있다.
2차대전 이후 세 나라의 관계는 항미 소-중 블록→반소 미-중 협력→대미 중-러 협력을 거쳐서 반미 중-러 연대로 접어들고 있다. 문제는 중국이 반미 중-러 연대라는 구도를 내켜하지 않는데, 끌려 들어간다는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역사적인 경쟁세력인 러시아와 연대가 반미 대결에서 얼마나 유효할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대중 대결을 위해 대러 관계개선이 필요한데, 대러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중국의 하위 파트너가 될 우려에 처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이 이런 세 나라의 딜레마를 격화시켰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