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가 지난 2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대사관에서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24일) 앞두고 전쟁 상황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우크라이나의 서른두번째 독립기념일을 나흘 앞둔 지난 20일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사진)는 한국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들과 함께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나갔다. 파랑·노랑이 어우러진 우크라이나 국기를 20m 길이로 펼쳐 들고 인근 정동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작은 시위를 벌였다. 그는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우크라이나인들과 함께 국가를 불렀다.
22일 서울 용산구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한겨레와 만난 포노마렌코 대사는 1년6개월간의 긴 전쟁에도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전투 의지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국민들은 여전히 휴전이 아닌 전투를 원했다”며 “1년 전에 비해 서방의 많은 무기를 지원받았기에 상황은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를 자국 영토에서 격퇴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었다.
지난 6월 초 우크라이나가 예고한 ‘대반격’을 시작했지만, 두달 넘도록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포노마렌코 대사는 “우리 반격을 평가할 때 성공적 작전의 전제조건인 상당한 규모의 공군 지원 없이 이만큼 해내고 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며 “가장 소중한 건 우리 군인들의 목숨인데, 최대한 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도록 신중하게 작전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군은 현재 격전이 벌어지는 동남부 전선에 집중적으로 지뢰를 매설하고 최대 40㎞에 이르는 다층 방어를 하고 있다. 그 때문에 복잡한 상황이지만, 대반격 이후 우크라이나가 240㎢ 이상을 해방시켰다고 포노마렌코 대사는 설명했다.
앞으로의 전황을 어떻게 예상하냐는 질문엔 “관건은 약속받은 무기들의 전달 속도”라고 답했다. 앞으로 전쟁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는 파트너 국가들의 군사·기술적 지원에 달려 있고, 우크라이나에 가장 필요한 건 현대식 전투기, 드론과 다양한 종류의 포·탄약이라는 설명이다. 나아가 지난해 여름과 비교할 때 이미 우크라이나는 상당한 무기 약속을 확보했기 때문에 미래는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포노마렌코 대사는 “최근에 F-16도 약속받았고, 전쟁 초기에 갖지 못했던 장비를 여럿 지원받았다”며 “1년 전만 해도 우리의 전투력에 대한 약간의 불확실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대로 지난 1년간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에이브럼스·레오파르트 등 서구의 주력 전차, 다연장로켓발사시스템(MLRS)을 갖춘 하이마스(HIMARS), 브래들리 장갑차, 패트리엇 방공 시스템 등 여러 무기를 지원했다. 네덜란드와 덴마크는 20일 우크라이나가 오랫동안 요청해온 F-16 전투기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역시 최근 조종사 훈련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훈련에만 최소 여섯달이 필요해 실제 활용 시기는 빨라도 내년 초로 예상된다. 그는 “우리 군은 러시아군이 천하무적이라는 미신이 틀렸음을 이미 증명했지만, 갈 길은 멀다. 러시아는 여전히 상당한 자원이 있고 핵 공갈에 의존해 전쟁을 장기화할 준비가 돼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지난 20일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와 주한 우크라이나인들이 32번째 자국 독립기념일인 24일을 앞두고 서울 중구 서울시청 광장과 인근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우크라이나 대사관 제공
최근 그도 러시아 용병부대인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사망을 전해들었다. 포노마렌코 대사는 프리고진의 반란에 대해 “러시아군의 약함·분열·평범함이 입증된 것”이라며 “블라디미르 푸틴을 위해 실제로 싸울 준비가 된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모두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프리고진의 반란은 분명 러시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어떠한 반란도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고 강조했다.
무장 반란을 하루 만에 접은 뒤 바그너 그룹은 벨라루스로 이동해 현지 군을 훈련시키고 있다. 그로 인해 전쟁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인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확대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폴란드는 이달 벨라루스 헬기가 자국 영공을 침범했다며 벨라루스 쪽 국경에 병력을 추가 파견했다. 포노마렌코 대사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바그너 그룹을 이용해 새 게임을 하려 한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며 “(벨라루스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겨루길 원하며, 그 게임에 바그너 그룹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터뷰가 이뤄진 지 하루 뒤에 프리고진이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바그너 그룹의 운명도 ‘시계 제로’ 상태에 놓이게 됐다. 포노마렌코 대사의 해석대로 루카셴코 대통령은 25일 자국 매체에 “우리가 이 군대를 필요로 하는 한, 바그너 그룹은 우리와 함께 살고 일할 것”이라며 이들을 군사적으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감추지 않았다. 포노마렌코 대사는 프리고진의 사망을 어떻게 보느냐는 28일 한겨레의 추가 질문에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다”며 “푸틴 정권은 그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훼손하는 사람들을 제거할 것”이라고 말했다.
포노마렌코 대사는 올해 우크라이나와 한국 사이에 두 가지 중요한 이벤트가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5월18일 우크라이나의 퍼스트레이디 올레나 젤렌스카 여사가 특사 자격으로 한국을 찾았고, 지난달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 그는 “전후 재건을 위한 인프라 공동사업에서 양국 민관 대표를 연결하는 작업이 지난달 키이우에서 시작됐다”며 “우리와 연대하고 지지를 보내준 대한민국 국민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러시아 침공이 이뤄지기 일주일 전 한국에 부임한 포노마렌코 대사는 지난 18개월 동안 단 한번도 업무 외에 짬을 내어 한국 여행을 가지 못했다. 고국의 상황이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이 언제 끝나길 바라냐고 묻는다면, 가능한 한 빨리”라고 말했다. “어떻게 힘을 보탤지 고민해 주십시오. 내년은 부디 평화의 해가 되길 바랍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