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1일 오후 뉴햄프셔주 세인트 앤설름대학에서 케이틀런 콜린스 <시엔엔>(CNN) 기자와 대담하고 있다. 시엔엔 누리집 갈무리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주류 방송과 타운홀 미팅을 갖고 특유의 거친 말투와 주장을 쏟아내 찬반 양쪽으로부터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만남을 주선한 <시엔엔>(CNN)은 트럼프에게 거짓말 기회를 줬다는 비판을 받자 유력 대선 주자에게 질문하고 의견을 듣는 게 언론의 역할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는 11일(현지시각) 뉴햄프셔주 세인트 앤설름대학 타운홀에서 청중들이 참여한 가운데 <시엔엔>의 케이틀런 콜린스 기자와 대담했다. 이 행사는 2021년 1월 퇴임 후 자신을 지지하는 <폭스 뉴스>를 제외한 주류 방송과 가진 첫 회견이었다. 특히, 그가 평소 ‘가짜 뉴스’라고 비난하던 자유주의 성향의 <시엔엔>과 대담한 것은 2016년 이후 처음이었다. 이날 대담을 이끈 콜린스는 2018년 7월 기자회견에서 트럼프에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나 그의 집사 역할을 했던 마이클 코헌 변호사에 대해 집요한 질문을 쏟아내 백악관 출입이 정지된 바 있다.
트럼프는 이날 행사에서 2020년 11월 대선이 조작됐다는 자신의 주장을 거듭 재확인했다. 또 자신이 낙선한 뒤인 2021년 1월6일 벌어진 미 의사당 난입 폭동 사건에 대해서도 옹호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이 폭동을 사실상 사주했다는 혐의에 대해선 자신이 트위터를 통해 발언한 시간대를 내보이며 일축했다. 오히려 폭동 시위자를 사살한 흑인 경찰관을 “폭력배”라고 비난했다. 나아가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이 상원 의장 자격으로 ‘조작된’ 대선 결과를 수정할 권한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시위대가 그를 표적으로 삼도록 한 것에 대해 사과를 거부했다. 그는 펜스가 “잘못된 일을 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트럼프는 또 2024년 11월 치러지는 차기 대선에 대해서도 “정직한 선거라고” 느낄 때만 승복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최근 문제가 된 성폭력 의혹에 대해서도 혐의를 부인하며 막말을 쏟아냈다. 그는 최근 뉴욕 주 검찰에 의해 기소되고, 9일 민사 소송에서 패소한 <엘르>지 칼럼니스트 진 캐럴 성범죄 사건에 대해 “가짜 뉴스”라고 부인했다. 그는 캐럴을 모른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며 “골 때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임신 중지권, 우크라이나 전쟁 등 미국 사회를 가르는 중요 현안에 대해선 똑 부러진 의견을 밝히지 않은 채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진행자 콜린스가 임신 중지권 관련법이 대통령에게 넘어오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자 “협상을 할 것이다”며 “그래서 사람들이 만족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임신 중지권을 옹호하는 이들이 ‘임신 9개월 된 태아를 죽이기를 원한다’는 틀린 주장도 되풀이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선 “승리와 패배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이기기를 원하는지 말하기 거부했다. 푸틴 대통령이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주장처럼 전범이냐는 질문에도 “나중에 토론해야 할 일이다”며 그를 전범으로 부르는 것은 분쟁을 끝내려는 협상 노력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연방부채 상한선 증액 협상이 늦어져 우려되는 파산 사태에 대해서는 “나중에 (어차피) 파산될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 파산하는게 좋다”며 “우리가 이 나라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행자 콜린스와는 거친 입씨름을 이어갔다. 콜린스는 트럼프가 내놓은 주장의 진위를 실시간으로 검증하면서 특정 사안에 대해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라고 압박했다. 특히 트럼프가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라라고 자택에서 보관한 중이던 기밀문서와 관련해 입씨름 벌였다. 결국 트럼프는 콜린스를 “싸가지 없는 사람”(nasty person)이라고 말했다.
이 방송은 무려 310만명이 지켜봤다. 트럼프가 자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캐럴을 비난하자 현장에 있던 트럼프 지지자들은 환호를 터뜨렸다. 트럼프가 내놓는 주장의 진위에 관계 없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모습은 여전했다. 하지만, <에이피>(AP) 통신은 트럼프가 특유의 거친 주장과 말투를 선보여 중도층과 무당파층으로 지지를 확산시키는데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시엔엔>은 존 코닌, 토드 영, 조시 홀리, 톰 틸리스 등 공화당 상원의원들도 트럼프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그를 대선에서 지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방송이 나간 뒤엔 <시엔엔>으로 비난의 불똥이 튀었다. 트럼프에게 거짓말을 할 판을 깔아줬다는 지적이었다. 그러자 <시엔엔>은 성명을 내어 대담을 진행한 콜린스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유권자들은 유력한 대선 주자의 말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권력자에게 질문하고, 해명하게 하는 것이 시엔엔의 역할과 책임”이라고 덧붙였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트위터에서 “그런 식으로 4년을 더 원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 선거운동에 힘을 보태달라”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등 유력 언론들은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모호한 입장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에 의구심을 던졌다고 우려했다. <뉴욕 타임스>는 트럼프가 “미국과 동맹국들에 수백억달러를 들인 분쟁의 승자에 무관심하다”고 했다면서 “트럼프가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를 돕기를 거부해 2024년 대선 유권자들이 냉엄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라고 평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