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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기후 위기 현장’ 서아프리카 “땅이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등록 2023-03-28 05:00수정 2023-03-28 10:20

유엔 몇년째 경고에도 전세계 외면
식량 위기 주민 3년 만에 4배 늘어
“분쟁까지 겹치며 아동 1천만명 위험”
세계식량계획이 후원하는 급식 프로그램을 통해 점심을 받아든 부르키나파소의 여학생들. 세계식량계획 제공
세계식량계획이 후원하는 급식 프로그램을 통해 점심을 받아든 부르키나파소의 여학생들. 세계식량계획 제공

“기후 위기가 주민들의 존엄성과 인권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2021년 11월11일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가뭄으로 곡물 수확이 크게 준 상황에서 인권 위기를 줄이려면 주민 이주를 촉진하는 것이 필요하다.”(2022년 11월16일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지난해보다 2배 많은 1천만명의 어린이들이 극심한 기후 위기 와중에 날로 심해지는 분쟁으로 위기에 처했다.”(2023년 3월17일 유니세프)

모두 서아프리카의 사헬 중부 지역 상황 이야기다. 사하라 사막 바로 남쪽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건조 지대인 사헬 지역 중 서아프리카 쪽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기후변화 위기가 눈앞의 현실이 된 곳이다. 모리타니·니제르·부르키나파소, 나이지리아 북부 등지의 상황이 특히 심각하다.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나빠지면서, 이 지역 주민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빼앗기고 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2021년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 맞춰 사헬 중부 지역 기후 위기를 인권 차원에서 집중 조명하는 보고서를 처음 냈다. 보고서는 기후 위기가 지구과학자들이나 환경운동가들이 경고하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인권을 위협하는 ‘지금 당장’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글래스고에 모인 세계 지도자들은 ‘말잔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책만 약속하고 헤어졌다. 한해 뒤인 지난해 11월 이집트 샤름엘셰이크에서 열린 제27차 당사국총회(COP27)에 맞춰,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다시 사헬 중부 지역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우리는 이 지역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기후 협상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건강과 복지를 지킨다는 궁극의 목표에 집중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 호소는 이번에도 큰 반향 없는 외침에 그쳤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기후 위기에 터전을 잃은 사람들

이런 가운데 지난 17일에는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가 기후 위기와 지역 분쟁 때문에 목숨을 위협받는 이 지역 아동이 1천만명에 달한다며 세계에 거듭 관심과 도움을 촉구했다. 마리피에르 푸아리에 유니세프 서부·중부 아프리카 책임자는 “2022년은 이 지역 아동들이 특히 폭력에 시달린 한해였다”고 지적했다. 유니세프는 “사헬 중부 지역의 기온이 세계 평균보다 1.5배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며 “강우량이 변덕스러운 양상을 띠고 집중적으로 비가 쏟아지기도 하면서 지난해 니제르는 몇년 만에 최악의 홍수 피해까지 겪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극단적인 기후 때문에 부르키나파소·말리·니제르 등 세 나라에서만 270만명의 주민이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신세”라며 사헬 지역과 비슷한 위기는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점차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했다.

크리스 니코이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서아프리카 지역본부장도 “서아프리카 사헬 지역의 강우량은 1990년대부터 꾸준히 줄어왔는데, 지난해에는 예년 평균치를 넘는 강우량을 기록하면서 19개국에서 500만명이 홍수 피해를 겪었다”고 전했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나타나면서 농업이 타격을 입고 토양이 황폐해지자, 주민들은 고향을 등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소규모 농업에 의존하는 니제르의 한 농촌 마을 주민 리타(가명)는 유엔 조사단에 “땅이 이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그녀는 “남편은 다른 수입원을 찾아 나이지리아로 떠났다. 우기가 시작돼 씨앗을 뿌리러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 남편처럼 돈을 벌기 위해 떠난 이들이 매일 연락해 “비가 왔느냐”고 묻는다며 “비가 오지 않으면 그들은 돌아올 수 없고 남은 우리끼리 땅을 일구는 힘든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니제르 동부 농촌 마을인 타우아에 사는 주민 미라(가명)는 “땡볕 아래서 힘겹게 땅을 경작해야 하는데, 어차피 한해 먹고 살 만큼 충분한 곡식을 수확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농부들과 목축인들 사이의 분쟁 때문에 고향을 등진 채 난민 캠프에 살고 있는 마야(가명)는 “가장 큰 어려움은 돈과 음식 부족, 말이 서로 다른 여러 부족이 좁은 공간에 함께 살면서 발생하는 다툼”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8월 거의 50년 만에 최악의 홍수 피해를 당한 감비아 수도 반줄의 주택가. 세계식량계획 제공
지난해 8월 거의 50년 만에 최악의 홍수 피해를 당한 감비아 수도 반줄의 주택가. 세계식량계획 제공

사헬 중부에서 서아프리카로 위기 확산

인구의 80%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 지역에서 농업 위기는 곧바로 식량 위기로 이어졌다. 유엔 세계식량계획 서아프리카 사무소는 지난해 10~12월 서아프리카 전체 지역에서 식량 위기에 직면한 인구가 3500만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했다. 서아프리카 사무소는 “지역 분쟁, 극단적인 기후, 코로나19 대유행 충격에 우크라이나 전쟁 영향까지 겹치면서 3년 만에 극심한 식량 위기에 직면한 인구가 4배나 늘었다”고 밝혔다. 또, 사헬 중부 지역에서 시작된 분쟁이 남쪽으로 확산되면서 위기는 아프리카 서부 해안 국가로도 번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아프리카 사무소는 장기 지속 가능한 해법이 나오지 않으면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는 주민이 올해 6~8월에는 4800만명으로 사상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내놨다.

수입 곡물 가격마저 2011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상승해, 주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카메룬의 경우, 밀과 쌀의 수입 가격이 각각 54%와 28% 올랐다. 시에라리온이 수입하는 식물성 기름과 쌀 가격도 한해 전보다 각각 83%와 35% 상승했다. 부르키나파소의 주요 곡물인 기장, 수수 가격은 지난해 10월 기준으로 한해 전보다 각각 90%와 81%나 뛰었다. 세계식량계획은 이 지역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올해 5월까지 적어도 8억8천만달러(약 1조14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와중에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등이 촉발한 분쟁까지 확산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무장 충돌이 특히 심해진 것은 2011년 이후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정부가 몰락하면서 리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니제르와 인근의 부르키나파소, 말리 등으로 무기와 무장 세력이 유입하기 시작했다. 2016년 9월에는 ‘광역 사하라 이슬람국가’(IS-GS)가 부르키나파소에 처음 등장했고, 이듬해에는 알카에다의 몇몇 분파들이 단일 조직을 구성해 말리 등에서 활동에 들어갔다. 이런 극단주의 폭력 세력들은 카메룬·차드·니제르·나이지리아 등으로도 퍼지고 있다. 미국 외교협회(CFR)는 이 지역 정부들의 부패와 민주주의 후퇴, 정당성 부족 등이 폭력적인 극단주의 확산을 부추기는 주요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2011년 말리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 이후 지금까지 분쟁 때문에 고향을 떠난 주민이 270만명을 넘을 만큼 사태가 심각한데도, 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식량계획의 기후 복원 사업 덕분에 녹지가 차츰 늘고 있는 니제르 라파 지역. 세계식량계획 제공
세계식량계획의 기후 복원 사업 덕분에 녹지가 차츰 늘고 있는 니제르 라파 지역. 세계식량계획 제공

주민 이주 권리 보장 시급

서아프리카 상황은 기후 위기에 사회·정치·경제·안보 문제까지 얽힌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해법을 찾기도 그만큼 더욱 어렵다. 니코이 본부장은 “허약한 정치적 지배 구조, 분쟁과 폭력, 식량·비료·연료 가격 폭등까지 이 지역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며 “경제 성장이 소외 계층까지 포용하지 못하는 형태로 이뤄지고 경제적 다양성도 부족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런 위기 해결을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지원과 협력이 절실하지만,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주 지역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시급하다고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촉구했다. 이 기구의 카롤리나 에르난데스 이주와 인권 담당 고문은 “주민들이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안전하게 옮겨 다니며 살 수 있도록 허용하면 인권 침해 위험을 줄이는 것은 물론 지역 내 국가들과 지역 공동체에도 이로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헬 지역 주민 상당수는 예로부터 반유목 생활을 유지하면서 계절에 따라 옮겨 다니며 가축을 길러왔다. 이런 전통적인 환경 대응 방식을 현대화하는 지역 차원의 통일된 이주 정책 수립과 협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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